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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재발견 - 거제해녀 2

기사승인 2018.08.24  17: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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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해녀의 역사 - 출가해녀(出家海女) 그리고 거제도

글 싣는 순서

    1. 거제 바당에 울리는 숨비소리 - 거제해녀 이야기
☞ 2. 출가해녀 그리고 거제 바다 - 거제해녀의 역사
    3. 거제도 인어할망과 인어아가씨 -거제 해녀의 삶(체험 수기)
    4. 거제해녀 단체 탐방 - 거제해녀컴퍼니·거제해녀학교
    5. 거제가 품어야 할 테왁과 자맥질 - 거제 해녀의 현실과 미래

 

자맥질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바다 생물 채집을 시작한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인류의 오랜 생존 방식 중 하나다. 이 후 우리나라 잠수와 해녀는 옛 문헌에서 나양하게 나타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문자왕 때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했다는 기록에서부터 예전부터 우리조상들의 잠수 어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 숙종 때인 1105년에는 ‘해녀들의 나체 조업을 금한다’는 기록과 조선 인조 때 제주목사가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한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엔 해녀뿐만 아니라 해남도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특히 거제지역을 바탕으로 쓰인 ‘몰인설’은 거제해녀가 있기 전에 거제에 나잠업으로 생계를 이어간 조상들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소중한 기록이다.

1689년부터 1694년까지 거제도에 유배 온 죽천 김진규(金鎭圭)선생은 1690년 어느 여름날 거제면 죽림포에서 전복을 채취하는 해남(海男,沒人)의 모습을 접하고 그의 문집인 <죽천집(竹泉集)> 권6 잡저조(雜著條)에 ‘몰인설’을 기록했다.

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 보다 약 100여 년 앞서 쓴 기록으로 거제지역에 활동하던 해남, 즉 잠수부의 해산물 채취 방법과 생활상을 잘 설명하고 있어 거제 해녀들의 역사와 전통을 증명하는 자료기도 하다.

제주도에선 잠수 작업, 즉 자맥질을 ‘물질’이라 했고, 전남과 경남지역에서는 이를 ‘무레질’로, 물질을 하는 사람을 ‘무레꾼’이라 불렀다는 기록을 보면 김진규 선생의 몰인설에 나오는 거제의 해남들은 당시 물질이 아닌 ‘무레질’을 하는 ‘무레꾼’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직업 전문 여성의 효시로 불리는 해녀들이 남자들을 밀어내고 바다를 정복한 시기는 언제부터였을까? 기록으로만 보면 해녀들의 물질이 대중화 된 시기는 17세기 후반부터로 알려졌다.

 조선전기 까지만 해도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따던 사람은 제주의 포작(鮑作 또는 飽作 : 물질하는 남성)들이었지만, 당시 기록으로 본 해녀는 얕은 물에 서식하는 미역과 우뭇가사리 등의 해조류를 주로 채취하는 여성을 뜻하는 잠녀라고 불렸다.

하지만 당시 조정의 과도한 전복 진상 요구로 해남들에게 큰 부담을 줬고 요구를 견디지 못한 해남(포작)들이 도망을 가서나 업을 포기 하면서  그 빈자리를 해녀들이 채우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해녀들의 물밑작업(?)은 전문 장비를 갖춘 일본 어업인의 침탈로 생업을 위협받을 때 까지 공동체를 이루며 이전 보다 더 진화돼 왔다. 어머니가 딸에게 또 그 딸이 자신의 딸에게 ‘테왁’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숨비소리’를 대물림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제주 해녀들의  바깥세상에 도전했다. 이른바 바깥물질로 19세기 말부터 제주 인근 바다의 해산물이 일본인 잠수기 어업으로 고갈되면서 시작된 해녀 역사의 어두운 단편이기도 하다.

바깥 물질을 하다 다른 지역에 정착한 해녀들을 ‘출가 해녀’라 불렸는데 이들은 지금도 거제 해녀 100년의 역사를 만든 거제 해녀 개척 세대들이다.

기록에 따르면 제주해녀의 출어(바깥물질)는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어민이 우리나라 바다에서 조업이 가능해 지면서 당시 최신 장비로 수산물을 마구잡이로 남획 하면서 부터다.

1880년대 초부터 일본의 잠수기 어선 137척이 전복을 200관씩이나 한꺼번에 채취해갈 정도로 잠수기 어업으로 인한 제주바다의 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출가 해녀의 정착지는 당시 일본제국의 세력권 내에 속해 있던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수산자원 시장을 확대하고 자원을 채취한다는 명목 아래 해녀들의 고급 기술과 노동력은 착취당했다. 그리고 그녀들을 고향 땅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이 시기부터 제주해녀들이 경상남도 지역에 첫 바깥물질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후 해녀들의 바깥물질은 경상도를 비롯한 다도해·강원도·함경도 등 육지지역 뿐 아니라 일본 도쿄와 오사카, 중국 칭따오와 다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영역을 넓혔다는 기사 등이 당시 매일신보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출가 해녀의 정착지는 당시 일본제국의 세력권 내에 속해 있던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수산자원 시장을 확대하고 자원을 채취한다는 명목 아래 해녀들의 고급 기술과 노동력은 착취당했다. 그리고 그녀들을 고향 땅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출가 해녀의 수는 1962년 4090명으로 늘어나는 등 정점을 찍다가 이후 점점 줄기 시작해 1970년대 이후엔 급격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다.

학계에선 출가해녀 및 제주해녀의 감소 이유를 여성의 교육기회 확대로 인한 고학력화, 관광산업 등 3차 산업으로의 취업 기회, 다른 도시로의 취업 확대, 수산업법이 정비 및 마을어업권 거주자의 권리 강화 등으로 보고 있다.

거제지역으로 이동한 출가 해녀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 것도 이 시기로 짐작된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구조라, 옥포, 장승포, 지세포, 해금강, 학동 등 거제바다엔 해녀들의 자맥질이 흔한 풍경이었지만 이 시기 이후부터 점점 보기 힘든 풍경이 됐다고 한다.

거제 해녀에 따르면 현재 거제지역에서 나잠업에 등록된 사람은 220여 명 정도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 물질의 사명을 잇고 사는 해녀들은 100여 명 안 밖이다.

거제 해녀들이 해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지난 2011년 거제시가 나잠(해녀)회 해녀들의 잠수복 구입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면서 비로소 거제 해녀 100년 역사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거제해녀의 역사는 지금부터인지 모른다. 검게 그을린 얼굴, 깊게 패인 주름, 굽은 등, 거칠고 딱딱하게 굳은 손마디만 훈장으로 남아 그녀들의 모진 삶을 대변하고 있지만, 언젠가 해녀의 대명사를 ‘거제해녀’로 바꾸겠다며 해녀문화의 전통과 명맥을 잇기 위한 열정이 예사롭지 않아 보여서다.

바다 건너 타향에 정착하기 까지, 낮선 바다를 고향으로 만들기 까지 100년, 모진 세월과 풍파를 억척스럽게 헤쳐 온 거제해녀야말로 우리나라 전문 직업여성의 선구자요. 바다를 품어온 우리 거제의 참 어머니상이 아니었을까.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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