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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新 又 日新 (2)

기사승인 2018.10.06  15: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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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식 /거제호산나교회 목사

지난 글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시작하자. 
인생은 고해와 같다. 하루하루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극적 삶의 꼬리를 끊어버리고 매일매일 새롭고 소망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여기서 회개란 단순히 짓던 죄를 반성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죄를 안 짓겠다고 고백하는 그런 종류의 회개가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세계관이 바뀌는 것을 회개하고 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온전한 회개가 가능한가? 이런 회개는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밖에서 주어지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서 가능한데 그 힘이 바로 성령의 힘이다. 성경은 그 성령에 의한 회개를 통해서만이 비극적 인생에서 소망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 
오늘 날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성도의 거룩이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적 부귀와 공명이 목적이 되어있다.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이 치료되며 부귀와 공명이 주어진다면 그 믿음의 대상이 굳이 예수가 아니어도 좋다는 식이다. 거의 대부분이 자식이 잘되면, 내가 돈을 좀 더 많이 벌면, 내 사업이 기적처럼 일어나면, 내가 세상에서 출세하면, 내가 좀 더 건강하면 자기가 더 행복해 질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심지어 긍정적사고니, 고지론이니, 더 나아가 마인드 콘트롤까지 동원해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내용이 아니고 자기 체면이며, 심리학이다.

오늘 날 교회는 이런 심리학까지 동원해서 하나님은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 날 교회의 대세가 되어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복음은 사라지고,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의 본질과는 멀어지고, 그래서 교인은 스스로 죽어가고 있다. 교회는 먼저 이런 것들을 회개해야 한다. 교회는 그런 식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당신을 살렸다고 하는 예수를 전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자신의 힘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수 있으며, 뭔가를 자꾸 행하여 이제 그 행위의 결과를 내놓고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악이며, 교회는 먼저 이것들을 회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하나님께 뭔가 보답을 해드려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까지도 하게 되는데 교회는 그것조차도 회개해야 한다. 은혜는 갚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갚을 수 있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거래다. 거래는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이다. 은혜는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나는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거저 감사합니다’하고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은혜다. 그때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발휘가 되는 데 그걸 선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보답을 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자꾸 생각하는 그게 바로 죄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자꾸 무력하게 부인이 돼 버려야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제일 못난이가 자기 자랑하고 자기 신앙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지금 성경을 올바르게 배우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더 큰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얼마나 자신들의 프라이드를 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올바른 걸 배우게 되면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리고 다른 이들의 죄악과 연약함과 어리석음 같은 걸 보면 그 안에서 내가 보여 져야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성숙할수록 점점 바보들만 앉아 있어야 된다.
정말 그 안에 값진 것들이 들어있는 바보, 다 알고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고 반응할 수 있으며 응전할 수 있지만 성경말씀을 통하여 내가 이제 어떤 존재인지를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에 힘이 있지만 그 힘을 나를 보호하고 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그런 바보들이 진정한 성도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 아니었는가? 세상에서 예수처럼 큰 바보가 어디 있는가? 하늘에서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서 다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 그냥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우리 생각에는 어느 정도 맞다가 다시 내려와서 그냥 뒤집어엎어버리는 그런 십자가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근데 계속 두들겨 맞다가 그냥 맥없이 죽어버렸다. 나를 위해 내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바본데 그 바보가 바로 예수님이시란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하늘의 바보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제일 강한 분이시었다. 우리는 그 하늘의 왕으로부터 거룩한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늘의 왕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장차 하늘에서 거룩한 왕 노릇을 할 것이란다. 그런데 그 하늘의 왕 노릇을 이 땅에서 조금 이렇게 맛보고 관리하면서 가야 되는데 그 왕 노릇이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바로 바보같이 당해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모함을 당했는데 입을 열지 않고 다른 이가 나를 공격했는데 응전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지나고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이 승리를 하게 된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때로는 그냥 가만히 두지 않는다.
성도는 이런 일로 때로는 낙심가운데 살지만 그러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우리도 차후 주님 나라에 들어가면  그들의 결말을 알게 될 것이다. 심판은 분명히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린 그렇게 매일매일 하나님의 징계인 것처럼 살지만 그러나 그렇게 바보가 되어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으니 거기서 제대로 잘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지기 위해 지금 이 세상에서 밑바닥부터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곧 그 나라로 갈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의 소유나 재화 같은 것들을 움켜쥐고 거기에 우리의 미래를 걸고 있다. 성경은 그것을 회개하라고 한다. 그러면 비록 지옥 같은 이 세상이지만 일신 우 일신의 소망적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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