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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의 조선군 수륙 합동작전

기사승인 2019.07.05  17: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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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문포 해전(長門浦 海戰), 장문포 왜성과 송진포 왜성

1594년 9월 29일(음력) 조선군과 일본군 최고의 명장이 한자리에 모인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서막을 연다.

이 전투는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 용맹을 떨쳤던 맹장이 대거 참여한 전투이자, 조선군 최초의 수륙 합동 작전인 장문포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통제사 이순신, 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친 육병장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이 출전시켰고 행주대첩의 권율이 지원군으로 등장한다.

또 일본군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제2진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 노량해전의 지휘관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 일본군은 제5진 사령관이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지휘를 맡는다.

장문포 해전이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였던 옥포해전이나 일본군의 전의를 상실케 했던 견내량 해전(한산 해전)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치른 9차례(17회)의 크고 작은 해전 중 가장 성과가 미미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최초로 조선수군의 수륙 합동 작전이 진행된 장문포 왜성 

장문포 해전(長門浦 海戰)

장문포 해전에선 모두 세 번의 전투를 벌였는데, 제1차 장문포 해전, 영등포(구 영등, 장목면 구영리) 해전, 제2차 장문포 해전으로 나누기도 한다.

장문포 해전이 이순신 장군의 해전 중 가장 성과 없는 전투가 된 원인은 처음부터 이순신이 계획한 전투가 아니라 당시 도체찰사 겸 좌의정 윤두수가 원균에게 건의받아 독단적으로 진행한 전투라는 배경 때문이다.

이후 영의정 유성룡에 의해 선조(宣祖)의 허락을 받아 작전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명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전투가 진행됐고, 한 달 반 동안 별다른 성과 없이 왜선 2척을 격침시키는데 결과에 만족해야 했다.

1594년 10월 1일 조선군은 장문포 앞바다에 도착해 대기하다 영등포로 이동해 싸움을 걸었지만 일본군은 성에 꼭꼭 숨어 응하지 않고 싸움을 피하기만 했다.

당시 일본군은 앞서 벌어진 이순신과의 해전에서 경험한 전력 차이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과 바다에서 싸우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방어전에 집중한 것이다.

3일 뒤인 10월 4일 조선군의 곽재우와 김덕령은 저녁 무렵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육지로 상륙 해 바다에서 수군이 함포사격을 지원하는 작전을 펼쳤다. 임진왜란 최초의 조선군 수륙 연합 작전이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1000여 명의 육군으로 공성전에 들어간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엔 역부족이었고 조선군은 전열을 정비해 칠천량으로 돌아갔다.

조선군은 11월 17일 또다시 장문포를 공격했지만 일본군은 ‘명나라와 강화회담이 진행 중이니 싸울 수 없다’는 패문(牌文)만 땅에 꽂아두고 도망가는 바람에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군은 한 달 보름 동안 수행한 작전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한산도로 복귀하게 된다.

이 전투로 독단적으로 작전을 진행한 윤두수는 책임을 지고 파직당하고 이후 조선과 일본은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휴전을 진행하게 된다.

▲ 해동지도 표기된 장문포 왜성과 송진포 왜성 

장문포 왜성과 송진포 왜성

조선군 최초의 수륙 합동작전이 벌어졌던 곳은 경남 문화재 자료 제273호인 장문포 왜성과 맞은편에 위치한 송진포 왜성으로 추정된다.

장문포 왜성과 송진포 왜성 그리고 영등포 왜성은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특히 장문포 해전에서 조선군 연합군이 장목만에 상륙해 두 성을 공격하려면 300보가 넘는 일본군의 화포 사정거리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에 섣불리 상륙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일제강점기 인본 해군이 남긴 장문포 왜성 견취도 

항구는 좁고 긴 거제의 관문이라는 뜻의 장문포는 장목면 장목항의 옛 이름이다. 장목만 서쪽 입구에 위치한 장문포 왜성은 일본군 제5진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휘하 장수였던 히치스카 이에마사가 장문포 해전 1년 전인 1593년 축성했다.

7430명이 성을 쌓고 주둔했다는 장문포 왜성은 둘레 710m, 높이와 너비는 3.5m 규모로 지어졌으며, 일부 성벽이 훼손되고 당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왜성의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하게 보존돼 있다.

▲ 장문포 왜성 

특히 장문포 왜성의 천수각터로 추정되는 부분엔 수많은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고 성터 곳곳에서 토기나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장문포 왜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군 제5진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송진포 왜성은 장목만 동쪽 입구에 위치해 장문포 왜성과 마주하며 장목만을 지키고 있는 성이다.

▲ 송진포 왜성 

장목면 금무정(국궁장) 양쪽 봉우리를 중심으로 쌓은 송진포 왜성은 인근 지역 주민들이 ‘시루봉’, 또 는 '시루성'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본이 성(城)을 ‘시로’라고 발음 하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국궁장 건립으로 성채 일부가 끊어진 상태지만 장문포 왜성과 마찬가지로 성벽이나 구조가 양호하다.

▲송진포 왜성에서 본 장목만 앞바다 

▲장문포 왜성에서 발견된 기와조각 

▲장문포 왜성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이 남긴 장목면 지역 왜성 견취도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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