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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재발견 지세포진성

기사승인 2019.08.19  09: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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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세포진성 종합정비계획 중간용역보고회, 경상남도 기념물 203호 지세포진성

지세포진성 종합정비계획 중간용역보고회

거제시는 지난 13일 시청 참여실에서 지세포진성 종합정비계획 중간용역 보고회를 진행했다.
이날 중간용역보고회는 지세포진성의 지표조사와 기초학술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 기준을 검토하고 향후 복원정비사업의 방향을 세우기 위해 전문가 및 주민, 공무원의 의견을 청취하는데 중점을 뒀다.

용역을 맡은 경남건축문화재연구원은 서문지 - 남문지 - 동문지 - 해자 조사 순으로 조사하고 복원정비(동문지 중심), 훼손 부분 보수정비(남북 성벽). 현황 유지 및 탐방로 개설 등을 정비하고 조사 결과에 따라 사적으로 승격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해자는 주로 평지성에 사용되는 방어시설인데 성곽 안에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포곡식(包谷式) 산성 형태인 지세포진성에 적용된 특이한 사례라는 점에서 복원 및 조사 연구가 필요해 보이며, 탐방로는 성벽을 중심으로 정비하고 향후 성내를 공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정비할 계획을 발표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지세포진성은 성벽의 잔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종합정비계획을 통해 조선시대 수군 진성으로 가치를 얼마나 보존하고 살릴 수 있느냐에 사적 등으로 승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또 현재 주민들의 주거지역이 밀집해 있는 서문지 개발 및 정비는 형상변경, 보상, 조례 개정 과정에서 충분히 주민들과의 상생을 고려해야 하며 체성의 복원 및 정비 외에 진성의 기능과 의미를 밝힐 수 있는 성내 건물지 발굴에도 비중을 둬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다.

이 밖에 수군진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선소 및 포구의 활용, 서문 지역 거주 주민 성내 이주, 사적 승격 이후 주민 생계 등에 대한 대책 마련, 진입도로 확보 등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시 관계자는 “지세포진성 종합정비계획의 목적은 사적으로 승격이 아닌 그동안 훼손된 문화재를 정비해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고 유지하는 것은 물론 유적에 대한 조사 발굴에 목적이 있다”면서 “우선 정비에 목적을 두고 진행하며 개발 및 복원 등은 향후 진행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상남도 기념물 203호 지세포진성

지세포진성은 수군만호진으로 대마도와 50㎞정도 떨어져 일본과 국경을 마주한 최전방이다.

거제도 동부 해안 북쪽에서부터 옛영등성, 옛율포성, 옥포성, 지세포성, 구조라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체계 중 하나로 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해안선이며 나머지 부분은 절벽으로 이뤄진 성이다.

선창마을 동쪽의 비탈진 산기슭에 180도 회전한 ‘ㄷ’자 모양으로 성벽이 남아 있는 지세포성의 둘레는 1096m, 높이는 3m(최대 폭 4.5m)다.

거제는 고대 한국·중국·일본의 해상교통로의 요충지(要衝地)로 특히 지세포는 일본으로 가는 쓰시마 난류(쿠로시오 지류)를 타고 대마도 해안에 이르는 중요한 바닷길의 시작점이었다.

고대부터 백제의 무역, 가야국의 일본 항해, 몽고의 왜 정벌, 조선의 대마도 정벌 모두, 거제도 해상을 경유해 대마도로 연결됐고, 여말선초(麗末鮮初) 3차례 대마도 정벌(東征)이 모두 거제도 해상을 이용됐고 지세포는 이 때마다 중요한 출발지(出發地)나 기착지(寄着地) 역할을 했다.

1425년 경상도지리지 관방 편에 따르면 1419년(세종 원년) 6월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거제지역 영등포(현 장목), 옥포, 탑곡(현 남부면 탑포), 지세포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지세포는 왜구 방어의 최전방 전초기지가 됐다.

1441년(세종 23년)에는 지세포에 만호를 두고 전선을 배치했고, 1485년(성종 16년)에는 지세포에 보(堡)가, 1490년(성종 21년) 9월에는 둘레 1605척(486.363m)의 지세포성이 완성된다.

이후 지세포성은 1545년(인종 원년)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 영남 지역의 6개 군에서 2만 5000여 명의 인원을 동원해 다시 포곡식 산성을 완성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 성루를 완성했다.
지세포진성은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 망루를 둔 것으로 보이며 동쪽 입구에는 성곽을 세웠던 주춧돌이 나란히 일렬로 남아있다.

지세포진은 왜구의 방어만 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의 대외관계 창구 기능도 했다. 지세포진성은 1441년 일본과 계해약조(조어금약)를 체결한 뒤부터 거제지역 해안에서 어업활동을 벌이는 왜인들에게 어업활동을 할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특히 지세포진은 조선통신사의 출발 및 기착지이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의 주경로는 부산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것이었지만 각종 역사문헌에 통신사의 귀국 경로에서 지세포를 통해 귀국했다는 사례가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지세포진성의 성주인 지세포 만호 한백록은 이순신 장군 등과 함께 옥포해전과 한산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이후 한산대첩에서 입은 상처로 전사했고 지세포 진성은 임진란 초기 1년을 제외한 나머지 6년 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백록 전사 이후 지세포 만호 강지욱(姜志昱)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싸우다 패해 성을 함락당했고, 임진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인 1604년(선조 37년)에는 지세포 수군만호진이 옥포의 조라포(助羅浦)에 속하게 된다.

지세포에 만호진이 다시 세워진 것은 1651년(효종 2년)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40여 년이 난 뒤로 지세포진이 폐진(廢鎭) 된 것은 1895년 갑오개혁 때다.

일운면지 등에 따르면 지세포진이 폐진 되기 전까지 성내엔 객사, 아사, 군기고, 군관청, 이청, 사령청, 화약고 등 기와 35칸, 초가 11칸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 건물들은 신식 군대인 통영수비대에 이관됐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점점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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