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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생각하다 ③

기사승인 2021.01.11  08: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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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2. 인간사회의 불평등

 2) 불평등체제의 등장

『불평등의 역사』를 저술한 역사학자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에 따르면 불평등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 조건이 이례적 안정기에 들어선 다음에야 급격히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초기 위계 사회’는 약 1만 4500년 전부터 따뜻하고 습해진 날씨로 인해 수렵‧채집 집단의 일부가 넘쳐나는 사냥감을 잡아들이고 충분한 양의 야생 곡물을 채취하여 작은 저장시설이 필요할 정도였을 때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약 1만 2800년에서 1만 7000년 전의 추운 기간 동안 서서히 사회 계층화와 불평등은 사라졌다가 ‘선토기 신석기시대 초기(약 1만 1500년~1만 500년 전)’에 정착촌의 확장과 개별 가구의 식량 저장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게 샤이델의 설명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2500년 무렵이 되면 지금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불평등의 형태가 세계 어디에선가 나타나게 되었고 진정 평등한 사회는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 다른 이들은 원하지 않는 몇몇 지역에만 한정되게 되었다고 켄트 플래너리(Kent Flannery)와 조이스 마커스(Joyce Marcus)는 얘기합니다. 세력권, 위계 및 불평등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거나 유난히 생산성이 높은 특정 장소에서만 발생했고, 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 생산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의 주요 동인이 되었으며, 수렵‧채집인의 평등주의를 무너뜨리고 소득과 부의 지속적 위계와 불균형으로 이를 대체한 새로운 양식의 최저 생활 및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 이행으로 이어졌다는 샤이델의 분석은 통념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세습적 불평등이 인구 성장, 잉여 식량, 또는 조개 껍질 따위의 축적을 통해 저절로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알려진 것처럼 ‘농경과 목축에 의한 잉여 생산물’의 등장이 불평등체제로의 전환에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인간사회가 본격적인 사회 계층화 또는 불평등체제로 전환된 것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초기 농경사회가 여전히 평등주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논리를 뒷받침합니다.

우리는 루소가 말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나 존 롤스가 얘기하는 ‘자연적 행운’에 속하는 ‘신체적 조건(근력, 지구력, 민첩성 등)’과 ‘재능(지능을 비롯한 다방면의 재주)’ 등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선사시대든 역사시대이든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한 개개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주의 사회에서 ‘우월한 능력’을 갖고서 지배하려는 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제압했는지는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그렇다고 지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은 평판과 명성을 획득한 ‘우월한 능력자’ 또는 경험 많은 ‘장로(長老)’가 지도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역사시대에 나타난 ‘권력자’와는 달리 상징적 존재(덕을 쌓은 사람)이거나 갈등의 조정자 역할 정도에 그쳤고, 그 신분이 세습되지도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평등체제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우선 보엠의 ‘무임승차자’의 존재에 대한 얘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엠은 ‘무임승차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적은 이타주의적 유전자들을 가지고 태어난 개인들, 혹은 적극적으로 이타주의자들을 이용하도록 돕는 ‘기회주의적인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라고 정의합니다. 또 인간의 진화를 다룰 때 무임승차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강력한 유형은 자기가 원하면 곧바로 가져가는 불량배(알파 유형)들이며, 불량배들은 사기를 칠 필요가 없는데 대담하게 무력을(또는 그에 따른 협박을) 사용하는 것이 이들의 전문분야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사기꾼입니다. 너그러운 이타주의자들은 사기꾼들에게 취약한데, 사기꾼들은 절도, 자원을 공유하지 않기, 개인 속이기, 무리 속이기와 거짓말하기, 협동하지 않기 등의 일탈적 행동을 하는 개체들입니다. 만일 모든 인간에게 이기심을 기반으로 무임승차자가 되고 싶고, ‘우월한 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면, 두 욕망의 결합된 형태가 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플래너리와 마커스는 이기심을 억누르는 압력이 사회 논리의 변화로 약해진 이후에야 복잡한 사회가 생길 수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무임승차자들과 일부 가족, 후손 집단은 애초 인간에게 행동의 법칙을 내려주었던 바로 그 존재와 자신들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월함을 정당화했는데, 그 존재란 전설 속의 조상이나 초자연적 존재(신)이며, 그 존재의 후손이라고 스스로를 우월한 지위로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여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 이웃과 공동체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불리한 처지로 내몰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사기를 치는 무임승차자들은 이타적인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소스타인 베블런의 관점에서는 ‘일꾼 본능’을 가진 사람들)이 이룩한 부를 ‘노동(그리고 다른 사람의 노동에 대한 지배)의 산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천상의 영혼을 흡족하게 해준 결과’라고 여기게 만들었으며, 순응적인 기질의 이타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우월적 지위를 허용함으로써 신분제가 탄생했다는 것이 유력한 가설 중 하나입니다.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이지요. 물론 이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사회에 내재해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토마 피케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오늘날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의 추구의 역사였을 뿐”이라고 했거니와 ‘조작된 신화’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얘기를 하는 사람은 유발 하라리입니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1995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터키 남동부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유적지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는 수렵‧채집인들에 의해 건설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괴베클리 테페 유적’에 대해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밖에 없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에다 “어쩌면 수렵‧채집인들이 야생 밀 채취에서 집약적인 밀 경작으로 전환한 목적은 정상적인 식량공급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원의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는 가설까지 덧붙입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하라리 가설의 진위 여부가 아닙니다. 조작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의 고된 노동(농경)이 시작되었고, 누군가는 스스로 노동을 면제받는 계급이 되었으며, 실용적인 이익이라고는 없는 일에 인간이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물론 조작된 신화와 이데올로기만이 불평등체제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불평등이 누군가가 또는 소수집단이 사회 논리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거나 사회 자체의 작용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면, 살펴보아야 할 다른 한 가지는 ‘노예’의 등장입니다. 정설로 알려져 있는 ‘노예의 탄생’은 부족 간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지만, 민족지적 연구에서는 ‘신부 값’이나 ‘부채’ 등에 의해 나타나는 경우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전학자 모지스 핀리는 ‘노예가 있는 사회(전체 구성원 중 대략 몇 퍼센트 정도)’와 ‘노예제 사회(인구의 몇십 퍼센트)’로 구분합니다만, 이 ‘노예’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첫째는 무임승차자의 노동을 대신하는 존재라는 것이고, 둘째는 ‘도구’로서의 의미입니다. 생존과 필요, 합의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강제노동’이 시작된 것이며, ‘노예=동산(動産)’이라는 등식은 인간이 자산(資産)의 일부가 되도록 했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도구화’의 출발을 뜻합니다.

신분제의 탄생이 중요한 이유는 그 신분이 정치적 위계질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겠지요. 우리의 경험과 역사는 ‘우월한 지위’와 ‘사회적 부의 독점 또는 과점’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한 테두리 안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합니다. 사회적 권력의 불평등은 부의 불평등을 낳게 하고, 부의 불평등은 사회적 권력의 불평등을 낳게 한다는 인식은 합리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샤이델은 연구자들이 상이한 발달 수준(수렵‧채집인, 원예인, 목축인, 농경인 등)을 가진, 세계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21개 소규모 사회에 대한 공동 연구를 통해 불평등의 두 가지 중요한 결정 요인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바로 토지와 가축의 ‘소유권’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부를 전달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 2부의 첫머리에서 서술한 내용, 울타리치기 운동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구조와 본질이 같습니다.

덧붙이면 역사적으로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부의 습득 양식은 단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만들기(making)’와 ‘차지하기(taking)’이며, 어쩌면 역사는 만들지 않고 차지하는 자(무임승차자)들이 승리한 기록일 수 있습니다. 즉 ‘차지하기’의 전형적인 형태가 ‘소유권’과 ‘부의 세습’이며 불평등은 조직화한 폭력과 기망(欺罔)이 중심역할을 했다는 것이 불평등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하지만 불평등이 늘어날 때마다 개인적‧집단적 저항이 있었을 것이고, 우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자와 이에 반대하는 자 사이에 지속적인 투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플내너리와 마커스는 『불평등의 창조』 말미에 이렇게 안타까움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불평등 사회가 만들어진 것)은 우리 조상들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불평등에 저항할 수 있는 수십 가지 가능성이 있었지만 항상 단호한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덕, 사업적 역량, 용맹을 높이 평가한 점에 대해서는 그들을 용납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특성이 세습된다는 견해만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베스트 셀러 『총, 균, 쇠』는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매우 풍성하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한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고고학자, 인류학자 등의 관찰과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역사관은 쉬워서 받아들이기 쉽지만, 그 이상의 위험을 내포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불평등이 생겨난 것은 잉여 식량 등의 물적 토대도 있지만, 우월적 존재가 되고자 했던 자들의 조직화한 폭력과 조작된 이데올로기를 사회구성원 다수가 수용한 데에 결정적 원인이 있다.

둘째, 불평등이 영속화된 것은 신분, 소유권, 부 등을 세습할 수 있도록 허용한 데에 있다. /계속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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