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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생각하다 ⑦

기사승인 2021.01.25  07: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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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2. 인간사회의 불평등

3) 불평등체제의 전개 ③ : ‘사탄의 맷돌(satanic mill)’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인간들을 통째로 갈아서 무차별의 떼거리로 만들어버린 그 ‘사탄의 맷돌(satanic mill)’은 무엇이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탄의 맷돌’은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시, 「저 옛날 그분들의 발자취가(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s)」 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 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하여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영국에 온 적이 있다는 전설, 울타리치기 운동, 특히 산업혁명 시기의 비참과 공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옛날 그분의 발자취가 / 정말로 영국 산천의 수풀을 지나치셨을까 / ‧‧‧‧‧ / 정말로 신의 자비로운 얼굴이 / 우리의 이 먹구름으로 가득 찬 언덕 위에 빛나셨을까? / 그리고 예루살렘이 정말 여기에 세워졌더란 말인가 / 이 음침한 사탄의 맷돌 사이에서?”

1차 울타리치기 운동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토마스 모어의 “당신들은 도둑들을 만들어내고선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하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면,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2차 울타리치기 운동과 1차 산업혁명 시기의 음산하고 비참했던 시대상황과 공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 ‘버려진 인간들’의 저항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가난한 자들에 맞서 부자들이 일으킨 혁명’이라고도 불려왔던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울타리치기는 격렬한 반대운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폭동(暴動, riot)’이며,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봉기(蜂起, revolt)’이자 ‘저항(抵抗, protest, resistant)’이 일어났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공유지에 의존하여 생계를 꾸리던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蜂起)는, 대표적으로 1536년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 땅의 울타리 등을 부수며 일어났던 1549년 케트의 봉기(Kett's Rebellion), 1607년 중북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1607년 뉴턴의 봉기(Newton Rebellion) 등이 있었습니다.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시기 동안에도 사적 재산권을 반대하는 주요 봉기들이 발생하였습니다. 농민들은 관습적인 권리로서 생계 부양의 권리가 있음을 계속 주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18~19세기 2차 울타리치기 운동 당시에도 빈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지역민들의 저항과 반발로 울타리치기가 지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토지가 근대적인 사유재산권으로 변하는 것에 대한 생존권 확보 차원에서의 농민들의 저항이었지요.

여기에다 1811년부터 1816년까지 계속되었던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과 1830년에 일어났던 ‘스윙 봉기(Swing Revolt)’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지 기계를 부수었다는 이유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나 ‘신기술에 반대하는 사람들’로 평가받는 일은 매우 부당하며 불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생존권이 걸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받는 임금은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빵 한 덩어리 겨우 살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 지배계급의 대응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은 시기‧지역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피지배계급에 대한 처벌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1349년 6월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노동자조례(Ordinance of Laborers)’, 헨리 8세가 제정한 1536년의 ‘부랑인 및 걸인 처벌법(An Act Punishment of Vagabonds and Beggars)’, 1563년의 ‘직인법(職人法)’, 1601년의 ‘빈민법’, 1662년의 ‘정주법(定住法)’, 1834년의 ‘신빈민법’ 등 확인 가능한 대부분의 법과 조례들은 통제와 처벌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법령들은 임금의 상승을 억제하거나 노동을 강제하고 거주지를 제한하여 노동을 통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동 빈민들의 ‘법적 무능력’을 확정하는 봉인(封印)으로 기능했습니다.

앞의 글 ‘불평등체제의 전개 ②’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부랑인과 걸인들은 쫓겨났거나, 버려지거나, 생계 수단을 찾지 못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다음은 건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김종일의 저서 『빈민법의 겉과 속』에 나오는 글입니다.

“특히 노동능력이 있는 부랑인에 대한 제재의 강도는 훨씬 세지고 그 내용도 세분화되었다. 초범의 경우에는 이틀 동안 매를 맞았다. 매질은 시장과 같은 공개 장소에 끌려가 맨몸으로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이었다. 재범에게는 매질을 한 뒤 칼을 씌어 놓았고 아울러 한쪽 귀를 잘랐다. 세 번째로 잡혔을 때는 나머지 귀마저 잘라내는 형벌을 받았다.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당시 영국은 가혹한 처벌을 담은 형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중범죄가 아니어도 사형에 처해지기 일쑤였고, 경범죄도 징역형으로 다뤄졌습니다. 엄중한 처벌이 범죄(?)를 억제할 것이라는 인식을 반영한 정책이었으며, 이런 정책의 집행으로 인해 죄수들을 가둘 공간이 부족해졌습니다.

한 가지 방안은 노후화된 선박을 해안에 정박시켜 감옥선(監獄船)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폭증하는 수감자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더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머나먼 식민지로 죄수를 내보내는 것이었고, 이 아이디어는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영국은 1777년까지 이미 4만 명 이상의 죄수를 식민지인 미국으로 유형 보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 북동부해안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사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이면서 상황이 변했고, 새로운 유형지를 물색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오스트레일리아였습니다. 1787년 5월, 700여 명의 죄수와 600여 명의 선원·교도관·일반인을 태운 열한 척의 ‘최초함대(First Fleet)’가 영국에서 출항했습니다.

1788~1868년에 16만 2000명에 이르는 죄수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유형살이를 했고, 쇠고랑을 찬 채 하루 12시간에 이르는 강제노역을 10~20년의 형기 동안 해야만 했지요. ‘스윙 폭동(Swing Riots)’이라 불렸던 영국 남부의 노동 빈민들이 탈곡기와 그 밖의 기물을 공격한 1830~1831년의 사건에서도 가담했던 사람들 가운데 약 650명이 투옥되었으며, 500명은 호주 식민지로 추방되었고, 20명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벤담의 추종자로 알려진 라클런 매쿼리 총독(1809~1821년 재임)은 이 시기 가장 유명했던 자였고, 그는 벤담의 ‘판옵티콘(Panopticon)’을 연상시키는 신형 교도소를 건축해 죄수 관리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형기를 마친 후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이 7%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식민지역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끌어당기는 힘’과 고국인 영국에서 ‘밀어내는 힘’이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낙인이 찍힌 채 영국에서 빈민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자유민으로서 경지를 조성하고 곡물을 재배하며 양을 사육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면서 매력적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 ‘사탄의 맷돌’에 짓이겨진 아이들

앞서 저는 영국의 많은 법령들이 “노동 빈민들의 ‘법적 무능력’을 확정하는 봉인(封印)으로 기능했다”라는 정말 건조한 문장을 썼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시기의 농업노동자, 도시 빈민, 광산 노동자 등의 처참했던 상황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Richard David Precht)의 역설적이면서 등골 서늘한 글의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19세기에도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인구 80%는 고대 로마의 노예들보다 딱히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했다. ‧‧‧‧‧‧ 노동자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누가 과거의 그런 노동을 애도할까? 19세기 말엽의 광산과 지옥 같은 제철소, 등골 휘는 밭일을 누가 아쉬워할까?”

하지만 ‘아동 노동’의 상황은 간단하게라도 언급해야만 합니다. 아동 고용의 상황을 살펴보면 1818~1819년의 ‘맨체스터 면직 공장 노동자’ 가운데 10세 미만은 전체의 49.9%에 이르고 20세 이하는 92.2%에 이릅니다. 1819년 의회 청문회의 증언에 따르면, 맨체스터에서 손과 팔이 기계에 잘려 병원을 찾은 아동이 연간 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또 이 시기 광산에서 일하는 청소년은 전체 광산노동자의 19%~40%를 차지했고, 1851년 영국 전체 광부 가운데 아동 노동자의 비율은 3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8세기 말 산업혁명 초기에는 아동들이 새벽 2시에서 저녁 8시, 9시까지 지하에서 일을 했고, 20시간 동안 지하 갱도에서 머물며 일했다는 의회의 조사보고서가 있습니다. 심지어 4~5세 사이의 아이들이 지하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1842년의 탄광법(The Coal Mines Act)으로 모든 여성과 10세 미만의 지하작업이 금지되었는데, 18년이 지난 1860년 광산에서 일할 수 있는 최저 연령은 10세에서 12세로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최저 연령 12세!

공장의 굴뚝 청소를 담당한 사람은 고아나 노역소(Workhouse)에서 데려온 아이들, 빈민법에 의해 도제로 보내진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서너 살부터 굴뚝 청소에 투입되었는데, 이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부모에 의해 팔려왔거나, 노역소에서 파견된 아이들이었습니다. 김종일은 이와 관련하여 “지역의 빈민법 체제 하에서 ‘보호’를 받던 아이들은 근대 자본주의 공장이라는 새로운 체제로 옮겨 갔다. 이러한 이동은 두 체제에 놓인 부담과 압박을 동시에 덜어주는 일석이조의 ‘묘책’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공장으로 보냄으로써 마을은 빈민 구호의 재정적 부담을 덜어냈고 공장은 인력 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라며, “공장주들과 구빈 당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범죄의 공범’이었다”라고 정리합니다.

○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긴 했을까?

2016년은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의 “민중은 개, 돼지”라는 발언과 “신분제를 공고화 시켜야 한다”는 말이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그러면 당시 영국의 1% 또는 10%의 생각은 더 짐작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평생 생산적 노동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진정한 상위 1%였는데, 그의 공리주의의 핵심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개념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벤담은 불쾌함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을 세상에서 ‘치워져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던 듯합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인 빈민들과 부랑인들이 원형감옥인 ‘판옵티콘(Panopticon)’에 가두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아이디어는 결국 그의 추종자에 의해 유형지였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실현되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빈민법을 더 개악하여 만든 1834년 ‘신빈민법’의 주요 입안자가 벤담의 비서를 지낸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신빈민법은 특정 집단의 자유와 행복 추구권을 증진시킨 반면, 다른 특정 집단의 행복추구권은 더욱 제한시켰지요.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1880~1914년 전체 총소득에서 소득 상위 10%가 차지하는 비율은 55%, 중위 40%는 33%, 하위 50%는 12%의 소득만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국 전체 국민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빈곤의 늪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1880~1910년 사적 소유 전체(부채를 뺀 부동산, 사업자산 및 금융자산)에서 부유한 상위 10%의 점유율은 대략 85~92%였고, 중위 40%의 점유율은 6~9%에 그쳤으며, 하위 50%의 점유율은 1~2%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벤담은 전체 소득의 12%와 전체 자산의 1~2%를 차지한 50%의 국민들이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2016년 4월 6일 ‘자유경제원 개원 19주년 기념토론회’의 강원대학교 신중섭 교수의 발제문 ‘천민민주주의는 극복될 수 있을까’입니다. 이 글은 필진 25명의 주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천민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천민이 주인 된 세상이 민주주의다. 그래서 역으로, 민주주의가 지탱되려면 귀족(nobility)이 그 척추를 이루어야 한다. 떼로 하여금, ‘천하고 상스런 떼의 논리’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존재가 귀족이다.”

벤담과 그의 무리들은 ‘귀족(nobility)’이었습니다. 극소수의 귀족은 벤담이나 신중섭과 같지 않으나 ‧‧‧‧‧‧.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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