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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생각하다 ⑪

기사승인 2021.02.08  08: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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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2. 인간사회의 불평등

 5) 불평등의 대가

  ○ 박중훈 vs 간호사

다음은 2010년에 개봉한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현직 삼류 깡패 박중훈이 쓰러진 현직 취업준비생 정유미를 둘러업고 병원 응급실에 온 상황입니다. 응급실에서 쫓겨나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중훈에게 간호사가 다가옵니다.

박중훈 : “왜 그런 거래요?”
간호사 : “(정유미는) 영양실조로 쓰러지신 거에요.”
박중훈 : “뭐? 영양실조? 아 씨발,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영양제를 먹고 영양실조 걸린다는게?”
간호사 : “제대로 된 밥 안 먹고 영양제로 때우니까 그렇죠”

그런데 이 상황의 ‘정유미’들에게 ‘노오~력’이 부족하니 가일층 ‘노오~~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은 현실 정합적일까요? 영양실조에 걸린 ‘정유미’들에게 ‘영양제’나 ‘진통제’를 처방하는 일은 정의로운 일일까요?

기성세대가 굳이 얘기해주지 않아도 이 세상의 ‘정유미’들 역시 세상 살다 보면 ‘영양제’와 ‘진통제’가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압니다. 가끔씩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필요한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은 사기에 불과합니다. 작은 ‘심리적 만족’을 행복이라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마음공부 하세요’, ‘마음을 비우세요’, ‘부자 되세요’, ‘걱정 말고 즐기면서 사세요’,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세요’ ‧‧‧‧ 따위의 말들이 대표적입니다. 다음은 어떤 스님(?)이 썼던 책 내용의 일부입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내 마음의 눈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그 마음 그대로 세상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뭐든 세상 탓만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좋고 싫고 힘들고 괴로운 감정들의 원인은 내 안에 내가 알게 모르게 심어놓은 것일 수 있습니다.”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성계에게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고 한 무학대사의 말씀을 이런 상황에 끌어다 쓴 사실 자체가 우스꽝스럽고, 기괴해 보입니다. 최대치의 무력(武力)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에게 한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의 관점에서 보면 이 ‘스님(?)’의 글은 ‘열등의 선고’입니다. ‘사회의 실패’를 ‘개인의 실패’로 돌려 “스스로를 탓하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고 속삭이는 것이고, 세상에 실존하는 부조리를 ‘정당한 불평등’으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지요.

밥 대신 영양제를 먹으라는 이 스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불평등의 대가

사실을 말하자면, 누군가의 실패와 성공은 자신의 능력과 의지보다도 어떤 대륙, 어떤 나라의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센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과 엘다 샤퍼(Eldar Shafir)는 『결핍의 경제학』에서 “실패와 빈곤 사이의 인과관계는 통념과는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 형성되는 게 타당해 보인다”라고 얘기합니다. 즉 실패했기 때문에 빈곤이 찾아온 경우보다 애초부터 빈곤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훨씬 더 일반적이라는 겁니다.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과 케이트 피킷(Kate Pickett)이 지은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는 소득 격차가 큰 사회에 사는 사람일수록 더 나쁜 건강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스스로 요약해놓은 글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기대수명은 짧은 반면 영아 사망률, 정신질환, 불법적인 약물 사용과 비만 인구의 비율이 더 높다. 불평등이 커질수록 사회관계도 훼손된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폭력 사건(살인율로 측정)이 많고 수감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에 신뢰도가 낮고 공동체 생활이 빈약하다. 또 불평등은 아동의 삶 기회도 손상시킨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아동의 행복 수준과 교육 성취도가 낮고, 10대 출산이 빈번하며, 사회적 이동성이 낮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연구가 부유한 국가들, 즉 OECD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컨대, 정신질환자 비율은 소득 불평등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독일(10% 미만)이 영미권의 국가들인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에 비해 매우 낮습니다. 미국이 최고치(30%에 근접)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가 2017년에 실시한 조사(‘Stress in America: coping with change’, Stress in America Survey, 2017)에 따르면 미국인의 80%가 불안감, 중압감, 신경과민, 우울감 같은 스트레스 증상을 한 가지 이상 경험하고 있다는 응답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계 불평등보고서 2018』을 보면, 미국은 중동의 산유국들을 제외할 때 부의 집중도가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즉 불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라는 뜻입니다.

윌킨슨과 피킷은 『불평등 트라우마』에서 세계 각지에서 불평등과 관련된 건강 및 살인율을 연구한 논문 수만 300건을 훨씬 웃도는데, 대다수 연구에서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결과들이 나빠지는 일관된 경향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반면 북유럽 국가와 같이 비교적 평등한 국가는 바람직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윌킨슨과 피킷이 『불평등 트라우마』에서 정리한 ‘불평등으로 인한 다섯 가지 문제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불평등은 사회적 기울기가 나타나는 문제를 악화시킨다 : 국가 간 비교에서 소득 격차가 클수록 사회적 기울기가 나타나는 거의 모든 문제(사회계층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흔해지는 문제)가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하위층으로 내려갈수록 건강 상태가 나빠지고,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건강 수준이 낮다.

2. 불평등은 사회통합에 영향을 미친다 : 소득 격차가 큰 국가일수록 사회적 이동성이 낮아지고, 사회적 위계가 엄격해지며, 스스로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증가한다. 서로 다른 사회계층의 구성원들 사이에 문화적•물리적•사회적 거리가 멀어진다.

3. 불평등은 사회결속력에 영향을 미친다 :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사회적 만남에서 점점 더 많은 스트레스와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결국에는 ‘교제를 피해 혼자 지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4. 불평등은 지위 불안을 증가시킨다 :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심리적 반응으로 자신감 부족과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우울증, 불안장애, 조현병 등이 증가한다. 역설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타인보다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자기 고양 편향’, 즉 ‘자기도취증’이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

5. 불평등은 소비주의와 과시적 소비를 강화한다 :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돈을 쓰는 경향이 있으므로 지위 불안의 증가는 불평등한 사회에서 돈이 한층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더 오래 일하고도 빚을 더 많이 지며 파산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적 수단에 의한 자기 강화라고 볼 수 있는 과시적 소비도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증가한다.

  ○ 불평등이 경제에 미치는 대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대다수 국민의 부가 감소하고, 중위 소득이 정체되고, 하위 계층의 대다수가 해가 갈수록 심한 곤궁을 겪고 있는 나라의 경제가 장기적으로 번영을 구가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의 으뜸은 ‘총수요의 부족’입니다. 스티글리츠는 주류경제학의 기본 가설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는 것인데, 현실 세계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수요가 충족되지 못한다고 판단합니다. 또한 시장의 무능력을 입증하는 실업은 가장 심각한 시장의 실패이고, 가장 심각한 비효율의 원천이며, 불평등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시장의 실패로 인한 실업과 노동자의 실질임금 정체가 1차적인 분배의 실패이고 총수요의 부족을 이끌었다면, 조세 정책의 후퇴는 재분배의 실패를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수요 진작을 위한 정부의 대응이 상위 1%의 세금 감면과 상위 기업들을 위한 법인 소득세율 인하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지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덧붙이면, 미국에서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득세 최고세율을 63%로 인상한 이후 1944년에 94%에 이르렀고, 1932년에서 1980년까지 거의 50년간 미국 최고연방세율은 평균 81%를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또 미국에서 상속재산 최고 구간에 적용된 상속세의 최고 한계세율은 1980년대 초반까지 70%에서 80%를 유지하다가 급격히 떨어져 2013년엔 35%까지 하락했습니다.

또 1940년에서 1980년까지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가운데 가장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이 낮았던 독일조차도 이 구간에서 항상 50%를 웃돌았으며, 이 추세는 2000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미국은 1980년 이후, 1986년 레이건 시절 최저점인 28%까지 하락했다가, 영국과 함께 30%에서 40% 사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자본』과 『세계 불평등보고서 2018』의 추세선들을 견주어 보면, 불평등의 증가는 조세 정책의 후퇴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확실한 인과관계에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스티글리츠는 경제학자임에도 정치를 얘기합니다.

“불평등은 정치 시스템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다. 불평등은 경제 시스템의 불안정을 낳고, 이 불안정은 다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 여러 가지 정책들이 조화롭게 결합하여 시행될 때에만 우리는 이 악순환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또한 스티글리츠가 지적하는 실업과 노동의 불안정성은 “능력이 부족하거나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제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다시 박중훈

스티글리츠는 마치 한국 영화인 「내 깡패 같은 애인」을 본 것처럼 얘기하였습니다.

문득 ‘최고의 사기란 어떤 사기일까?’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기꾼이 ‘스스로 사기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와 ‘사기를 그냥 비즈니스(사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중에서.

「내 깡패 같은 애인」의 박중훈은 좀 비현실적인 ‘삼류 깡패’일망정 사기꾼은 아닙니다. 다음은 라면집에서 박중훈이, 취업 면접에 떨어지고 온 정유미에게 위로랍시고 한 말입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나라 백수들은 착해요. 테레비에서 보니까 그 프랑스 백수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지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아유~ 새끼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야 넌, 너 욕하고 그러지마, 취직 안된다고. 니 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어~! 힘내, 씨발!”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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