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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무엇인가 ⑭

기사승인 2021.03.05  08: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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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3. 기본소득

3) 무지의 베일과 정의, 그리고 기본소득

○ 존재했던 나라

지금은 사라졌지만 실존했던 어떤 나라가 있었습니다. 인구총조사가 없었던 시절이라 신분에 따른 인구구성비는 학자들에 따라 추정치가 다르기는 합니다만, 대략 이 나라에서 왕족을 비롯한 귀족계급이 총인구에서 차지했던 비율은 1.9%, 노예가 40~50%, 나머지 50% 정도는 평민이었습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생산은 98.1%의 사람들이 책임을 졌고, 격리구역 게토(ghetto)에는 천민들이 모여 살기도 하였습니다. 중세 유럽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지배계급은 동족(同族)을 노예로 부렸고, 국가기관이나 귀족계급에 속한 노예들은 일종의 자산(資産)이었습니다.

여기서 질문 두 가지.

① 만일 우리가 이 나라에 태어나 살았더라면, 귀족계급이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② 시간을 거슬러 이 나라에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 어떤 신분으로 태어날지가 제비뽑기로 결정된다면 우리의 기분은 어떠할까요?

아마도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 자체에 공포를 느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분제도가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권력, 기회, 소득, 재산 등을 분배한다는 점에서 지나친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견해를 빌려 다시 말하면,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 누릴 수 없는 권리와 권력을 갖고 있지만 타고난 환경은 그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삶의 전망이 이런 ‘임의적 요소(우연)’에 달려 있다면 정의롭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상위 1%의 사람들이 부(富)의 45%를 차지하고, 중위 19%가 부의 49%를, 하위 80%의 사람들은 단지 6%의 부만을 차지하고 있는 세상에 랜덤(무작위)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상황은 어떻습니까?

○ 무지의 장막

장막(帳幕, veil)이란 내부의 사실이나 현상이 보이지 않도록 막거나 가리는 사물을 일컫습니다. ‘무지의 장막’ 또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란 앞서 언급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 서술한 아이디어입니다.

롤스는 정의의 원칙을 선택함에 있어서 관련 당사자들이 모든 이에게 공정하고 공평한 원칙을 선택하기 위해 각자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할 천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지식을 무지의 베일을 통해 배제합니다. 즉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가설적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현실의 우리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지식, 소득과 자산의 정도, 이해관계, 타고난 성품 등에 의하여 일정한 편향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직관을 이끌어줄 자연스러운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한을 두는 것이고, 그 제한된 상황이 ‘원초적 입장’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현재의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조건을 깡그리 다 잊고 어떤 것이 가장 좋은지 판단해보라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자신의 성별과 나이, 국적, 피부색까지도 머릿속에서 지워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라는 뜻입니다.

즉 원초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무지의 베일을 쓰고 있는 상호 무관심한 합리적 당사자들이라고 잠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롤스가 “가장 합리적인 정의의 원칙은 모두가 공정한 위치에서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내용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인 셈이지요.

이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확인하는 일은 심리학자들에 의해 ‘실험 윤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식으로 행해졌습니다. 미국, 캐나다, 폴란드 등에서 실험이 이루어졌으며, 서로 다른 배경과 가치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게 다음의 네 가지 가능한 규칙 가운데 어떤 소득분배의 원칙을 선호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다음은 논문 「정의 선택 : 윤리 이론에 대한 실험적 접근」에 소개된 네 가지 소득분배의 원칙입니다.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은 <참고>에 있습니다.)

① 최저(기저) 소득 극대화(Maximizing The Floor Income)
② 평균 소득 극대화(Maximizing The Average Income)
③ 기저(바닥) 제약으로 평균 최대화(Maximizing The Average With a Floor Constraint)
④ 범위 제약으로 평균 최대화(Maximizing The Average With a Range Constraint)

제 방식으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①은 최하위 계층의 소득 수준을 높이되 최하위 소득이 높아지지 않으면 다른 계층의 소득 역시 증가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입니다.

②는 경제성장만을 염두에 두는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GDP와 1인당 평균 GDP를 높이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최하위 계층과 최상위 계층의 소득 격차나 최하위 계층의 빈곤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③은 최하위 계층의 소득이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수준이 될 수 있도록 소득의 분배를 결정하고 난 다음, 평균 소득을 높이자는 방법입니다.

④는 최하위 계층과 최상층의 소득 차이를 정해놓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최하위 20만원, 최상위 100만원으로 80만원의 소득 차이를 용인한다면, 최하위 계층의 소득이 40만원이 될 때 최상층 소득은 120만원으로 소득 차이는 80만원으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은 어느 원칙을 가장 선호하였을까요? 정답은 ③번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이 몇 시간에 걸쳐 소그룹 토론을 하고 난 다음, 즉 ‘숙의민주주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는 ③번을 선택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고 합니다.

또한 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에서 2004년에 실시한 조사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경제 안전(Economic Security for a Better World, Geneva: ILO 2004)」에서도 ③번의 ‘소득 기저 원칙’이 가장 큰 지지를 받았고, 여성이 남성보다 조금 더 강한 지지를 보였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현실은, ‘②번 평균 소득 최대화’의 탈을 쓴 ‘1%의 소득 최대화’에 다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상위 1%의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면 평균 소득은 높아지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가장 정의로운 ‘소득분배의 원칙’은 몇 번이어야 할까요?

○ 정의의 원칙과 실질적 자유

정의(正義)란 과연 무엇일까요? 매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만, 무지의 베일 속에서 네 가지 소득분배의 원칙에 관하여 숙고하다 보면 실마리 하나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경식이 던져주는 말에도 실마리가 있습니다. 황경식에게 있어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고, 사랑은 ‘각자에게 그의 몫 이상을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가 최소한의 사랑이라면 사랑은 정의의 완성”이라는 것이지요.

사전적인 의미에서 ‘공정(公正)’이란 ‘공평하고 올바름’이며 ‘정의(正義)’의 기본의미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를 뜻합니다.

즉 정의는 어떤 경우에도 혜택받은 특정 개인이나 소수만을 향해 있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자 롤스가 ‘공정(公正)으로서의 정의(正義)’를 얘기할 때도 전체 사회를 향해 있습니다. 롤스가 『정의론』의 11절에서 제시하는 ‘정의의 두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제1원칙: 평등한 자유의 원칙),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제2원칙: 차등의 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즉 ⒜ 모든 사람들의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제가 보기에 제1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자유주의자로서 접근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선언이라 여겨집니다.

롤스가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을 제시하는 것은 현존하는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 준거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즉 허용 가능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수준을 생각해보자는 것이지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주장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함에도 롤스에게 있어 차등의 원칙은 천부적 재능의 분배를 공동의 자산(common asset)으로 생각하고 그 결과에 상관없이 이러한 분배가 주는 이익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데 합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롤스의 두 원칙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파레이스와 판데르보호트가 『21세기 기본소득』에서 제시하고 있는 ‘실질적인 자유’의 개념과 크게 벗어난 지점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은 롤스의 ‘정의의 원칙’에서도 기본소득의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해내고 있습니다.

‘실질적 자유’라는 것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할 단순한 권리(형식적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진정한 역량(돈, 시간적•심리적 여유 등)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실질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정의의 실천으로서의 기본소득

‘무지의 베일’과 ‘정의의 원칙’은 기본소득에 대한 ‘정의’의 근거를 강화합니다. 그러나 ‘무지의 베일’이든 ‘정의의 원칙’이든 허전함이 남습니다. 그 허전함 가운데 한 가지를 황경식은 『존 롤스 정의론』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의의 이론이 아무리 정연하고 우아하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에게 정의를 실현하고 실행할 의지와 역량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 필자가 지난 수십 년간 『정의론』을 천착해오면서도 결국 현실적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실천 의지, 실행 역량 때문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은 정의를 실천하는 동력이자 실천 의지, 실행 역량이 될 수 있을까요? 지눌 선사께서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의 땅, 그 땅으로서의 역할을 기본소득이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루소의 서술처럼 “환경의 추이가 항상 평등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루소가 옳다면,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평등을 향한 노력도 정의로운 것입니다. 생각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면 말입니다. 또한 공적 이전을 제외하면 소득격차를 줄일 수 있는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들다는 점은, 자연스럽게 가장 정의로운 ‘소득분배의 원칙’으로서의 기본소득을 떠올리게 합니다.

‘용납할 수 없는 불평등’이 더욱 깊어질 수 있는 위기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COVID-19 팬데믹이 끝나갈 때쯤 마주하게 될 위험의 깊이는 가늠하기 힘듭니다.

미국 최고의 풍자가이자 휴머니스트, 소설가,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1922-2007)은 『나라 없는 사람(A Man without a Country)』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은 어떨까? 오늘날 그가 살아 있다면? 길 버먼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무신론자가 될 겁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죠.”

<참고>

○ N. Frohlich and J. A. Oppenheimer, Choosing Justice: An Experimental Approach to Ethical Theo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정의 선택 : 윤리 이론에 대한 실험적 접근」 35~36쪽

1. MAXIMIZING THE FLOOR INCOME (최저(기저) 소득 극대화)

The most just distribution of income is that which maximizes the floor (or lowest) income in the society.

This principle considers only the welfare of the worst-off individual in society. In judging among income distributions, the distribution which ensures the poorest person the highest income is rhe most just. No person’s income can go up unless it increases the income of the people at the very bottom.

⇨ 소득의 가장 공정한 분배는 사회의 기저 소득(또는 최저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사회에서 최악의 개인의 복지만을 고려합니다. 소득 분포를 판단할 때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높은 소득을 보장하는 분포가 가장 공정합니다. 맨 밑에 있는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하지 않는 한 누구의 소득도 올라갈 수 없습니다.

2. MAXIMIZING THE AVERAGE INCOME (평균 소득 극대화)

The most just distribution of income is that which maximizes the average income in the society.

For any society maximizing the average income maximizes the total income in the society.

⇨ 소득의 가장 정당한 분배는 사회의 평균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에서 평균 소득을 극대화하면 사회의 총소득이 극대화됩니다.

3. MAXIMIZING THE AVERAGE WITH A FLOOR CONSTRAINT OF $____ (기저(바닥) 제약으로 평균 최대화)

The most just distribution of income is that which maximizes the average income only after a certain specified minimum income is guaranteed to everyone.

Such a principle ensures that the attempt to maximize the average is constrained so as to ensure that individuals “at the bottom” receive a specified minimum. To choose this principle one must specify the value of the floor (lowest income).

⇨ 소득의 가장 정당한 분배는 특정 최소 소득이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후에만 평균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평균을 최대화하려는 시도를 제한하여 "최하위" 개인이 지정된 최솟값을 받도록 보장합니다. 이 원칙을 선택하려면 기저 소득(최저 소득)의 값을 지정해야 합니다.

4. MAXIMIZING THE AVERAGE WITH A RANGE CONSTRAINT OF $____ (범위 제약으로 평균 최대화)

The most just distribution of income is that which attempts to maximize the average income only after guaranteeing that the difference between the poorest and the richest individuals(i.e., the range of income) in the society is not greater than a specified amount.

Such a principle ensures that the attempt to maximize the average does not allow income differences between rich and poor to exceed a specified amount. To choose this principle one must specify the dollar difference between the high and low income.

Of course, there are other possible principles, and you may think of some of them.

⇨ 소득의 가장 정당한 분배는 사회에서 가장 빈곤한 개인과 가장 부유한 개인의 차이(즉, 소득 범위)가 특정 금액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보장한 후에만 평균 소득을 극대화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평균을 극대화하려는 시도가 빈부 소득 차이가 지정된 금액을 초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도록 보장합니다. 이 원칙을 선택하려면 고소득과 저소득 사이의 달러(소득) 차이를 구체화(명기)해야 합니다. 물론 다른 가능한 원칙이 있으며 그중 일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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