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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무엇인가 ㉑

기사승인 2021.04.16  1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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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3. 기본소득

10)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역사 ④ : ‘극한의 경험’에 짓눌리고 ‘괴물’을 발견한 시대

○ 제2의 물결의 배경

스탠딩의 구분법에 따르면 제2의 물결은 제1차대전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를 말합니다. 이 시기는 제1차대전의 여파로 인해 전 유럽이 황폐화되고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으며, 경제에 있어서는 금본위제의 붕괴와 대공황 그리고 하이퍼 인플레이션, 파시즘과 나치즘의 등장, 제2차대전의 발발과 냉전 시대의 시작, 복지국가의 건설과 함께 시작한 ‘자본주의 황금기’의 도래까지, 어마어마한 격랑의 시절이었습니다.

격변의 시절마다 가장 고통받았던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보면서 먼저, 유발 하라리의 『극한의 경험(The Ultimate Experience)』에 들어 있는 다음의 글을 통해, 이 시대를 통과했던 사람들의 정신적•육체적 외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프랑스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장 노통 크뤼(Jean Norton Cru)는 “용기와 애국심, 희생, 죽음과 관련해 우리는 지금까지 내내 기만당했다. 첫 총성이 울리는 순간 우리는 참전용사에 관한 소문과 일화, 역사, 문학, 예술, 대중 연설 등이 모두 거짓임을 깨달았다.”고 기록했다.

무슨 말이냐면, 19세기까지의 전쟁들의 경험으로 비추어 대개는 제1차대전을 몇 달 정도, 전쟁의 수뇌부들조차 1차대전의 기간을 6개월 정도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산업문명과 기계문명이 가져온 새로운 형태의 전쟁과 세력균형에 대한 오판은 상상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양차대전을 통해 인류는 무지막지한 쇳덩어리인 탱크에 깔려 죽었고, 비행기에서 투하하는 폭탄과 참호 속으로 뿜어대는 독가스에 사망하였으며, 끝내 원자폭탄이라는 상상조차 못했던 ‘괴물’까지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대전에서 사망자 수는 1,000만 명, 부상자 수는 2,0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제2차대전의 사망자 수는 3,500만~6,0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전쟁 기간과 이후에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포함하면 기계문명이 학살한 인류의 수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정도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이에는 대공황까지 있었지요.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집단적 트라우마와 공포가 존재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러한 공포감은 문학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등은 자본주의 체제의 오작동과 그것의 현실태였던 제국주의가 몰고 왔던 광기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이 극한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1차대전에 참전했던 칼 폴라니는 대학살을 자행하도록 설계된 사회공학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경악했고, 전쟁을 숭고함과는 반대되는, 다시 말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행위라고 말했지요. 또 많은 사람이 ‘의미의 진공 상태’로 함몰되었으며, “인간은 얼어붙은 가면을 공포에 휩싸여 응시하는 골렘, 끔찍한 기계 속의 고통스러운 영혼”이 되었다고 편지에 썼습니다.

그러나 폴라니가 끝내 이 세상을 위하여 『거대한 전환』을 집필했던 것처럼,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이들의 노력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음의 글처럼 말이지요.

“이봐, 전우여 ‧‧‧ 내가 용케 살아남게 되면 우리 둘을 망가뜨린 이것과 맞서 싸우겠네. 자네의 생명을 앗아가고, 나의 생명도 앗아가는 이것에 맞서서 말이네. 전우여, 자네에게 약속하겠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이네.” - 『서부전선 이상 없다』

또한 그러한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은 1차대전과 대공황, 2차대전을 통과한 이후에도 “왜 우리 경제생활과 삶에 대한 통제가 소수의 손에 갇혀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했고, 21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 의해 스탠딩은 “두 번째 물결의 추동력은 근본적으로 ‘사회정의’이며, 1차대전의 과오와 노동자계급의 대거 희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지요.

○ 제2의 물결 ①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의 ‘자유로 가는 길’

기본소득에 대한 공적인 논쟁의 포문을 연 것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했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 1872-1970)이었습니다. 또 메이블 밀너와 데니스 밀러 부부, 버나드 피카트, G.D.H.콜 그리고 헨리 조지의 제자들에 의해 두 번째 물결이 일었습니다.

러셀은 1918년에 출간한 『자유로 가는 길(Proposed Roads to Freedom)』에 일반적 원칙으로서 기본소득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우리가 지지하는 계획은 본질적으로 이렇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사람은 누구나 적지만 생필품을 구하기에는 충분한 소득을 일정액 보장받아야 하며,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생산된 재화의 총량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공동체가 유용하다고 인정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또 러셀은 산업을 자유로운 공동체가 운영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그 안에서 생산자들이 생산 방법과 조건, 노동 시간 등 모든 관련 문제들을 결정할 수 있게 되고” 그를 통해 “거의 무한한 향상을 이루어낼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일과 대가를 연계시키지 않는 경우 게으런 사람이 생길 수 있으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더불어 그들 가운데 예술가, 저술가, 추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사치는 하지 못해도 생존에는 충분한 ‘부랑자의 임금(vagabond’s wage)’을 지불하면 된다고 썼습니다. 또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한 뒤 온종일 일한 사람의 보수와 비교해서 그 노동시간 차이에 비례하는 만큼 적은 보수를 받는 것”도 방법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러셀에게 있어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한 것은 다음의 밀너 부부와 콜, 클리포드 더글러스 등에 의해 제시됩니다.

○ 제2의 물결 ② : 밀너 부부의 “각자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각자를 위해”

러셀이 『자유로 가는 길』을 출간한 그해에 메이블 밀너(Mabel Milner)와 데니스 밀너(Dennis Milner) 부부는 「국가 보너스 계획: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인 방법(Scheme for a State Bonus: A Rational Method of Solving the Social Problem)」이라는 16쪽짜리 팸플릿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버나드 피카드(Bernard Pickard)와 함께 ‘국가 보너스 연맹’을 구성하여 이를 실현하려고 하였지요.

이들이 「국가 보너스 계획」에서 제시한 기본 원칙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개인은 언제나 중앙기금에서 소액의 수당을 현금으로 받아야 한다. 이는 다른 것이 없다 하더라도 삶과 자유를 유지하는 데 충분해야 한다.

⒝ 모든 사람이 이 중앙기금에서 몫을 받게 됨에 따라 소득이 있는 모든 사람은 능력에 따라 각자의 몫으로 기여해야 한다.

또 “모든 남성, 여성, 아동은 각자의 권리로 이를 가져야 한다. 과거의 실수나 잘못과 상관없이 이는 그들의 것이어야 하며, 좌절한 사람이 새로운 희망을 갖고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공기와 햇빛처럼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개별성의 원칙을 주장할뿐더러, 소위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금액은 너무 많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게을러서, 노동하지 않고 사치가 가능할 경우 이들은 쉬려 할 것이다.”며 이 시대의 대세였던 ‘노동주의’와 타협하며, 이 부분에 대한 러셀의 통찰과는 거리를 둡니다.

「국가 보너스 계획」에서 재원 마련의 핵심은, 중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모든 소득의 20%를 기여금으로 납부하는 데 있고, 그렇게 형성된 기금에서 동등한 몫을 받게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연간 모금액은 4억 7천만 파운드 정도이고, 1인당 매주 5실링을 분배받게 됩니다. 그리고 7천만 파운드 이상 들어가는 공적 자선(노령 연금, 빈민법, 건강보험 등)의 필요성이 없어질 것으로 예측하며, 90%의 국민(연간 550파운드 이하)이 재정적 이득을 얻게 될 것이라 계산하였습니다.

또 5인 가족의 경우를 예로 들어, 연간 (근로 및 불로)소득 500파운드를 가정하면, 중앙기금에 20%인 100파운드를 기여금으로 내고, 5인 가족이 65파운드의 국가 보너스를 받고, 남자에게 보험료(생명보험, 질병, 사고, 거치 연금 등)를 최소한 연간 45파운드를 지급받으면, 이 가족은 모두 합해 ‘65파운드+45파운드=110파운드’ 이상의 수당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 가족은 연간 510파운드 이상의 소득이 보장된다는 겁니다.

여기에다 ‘물가연동제’를 제시하였는데 그 방법은 “물가 인상으로 보너스 금액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자동으로 그에 맞게 기금도 증가되도록 기여 몫을 조정”하기 위해 20%의 고정된 비율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분배 물가가 10% 오르면 기금도 10%가 많아져서 국가 보너스로 기본 생필품을 구매하는 데 지장이 없다는 치밀한 계산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계획은 간단하지만 완벽한 이윤과 손실의 공유 체계로서 산업의 효율성과 생산성, 산출고(産出高, 물품을 생산하거나 물품이 생산되어 나오는 양) 제한의 철폐라는 점에서 모두에게 직접적 이득”을 주며, 왜냐하면 “생산의 20%가 모두의 혜택을 위해 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현대의 언어로 바꾸면 국가 보너스가 소비자의 구매력을 증가시켜 경제의 선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계획은 “기존의 체제에 전혀 손을 대지 않는다.”는 구상이므로 혼란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이들이 내세우는 장점을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빈민법의 경우 총액의 75%가 유지비(행정 비용 등)로 들고 25%만이 극빈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므로 기존 빈민법보다 예산 절감 효과가 크다.

둘째, 국가 보너스는 아동이 학교를 더 오래 다니도록 해줄 것이다.

셋째, 실패하는 사람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줄 것이다.

넷째, 결혼한 남성이 독신 시절의 생활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것이다.

다섯째, 여성은 결혼에 대해 적절한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질 것인데,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덜 의존적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유지하는 데 공동체로부터 확실한 도움을 받기 때문에 여성은 또한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여섯째, 국가 이윤 분배 계획(Scheme of National Profit-Sharing)과 같은 것이 없다면 계급끼리 심각한 분열과 악감정을 갖게 될 것이고, 국민생산에 기초한 이 국가 보너스의 분배는 전쟁에 의해 발전한 단결의 목적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각자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각자를 위해”라는 아이디어를 영속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데니스 밀너는 1920년에 『국가 보너스를 통한 국민 생산의 제고: 국가적 생산성에 따라 변하는 최저소득을 모두에게 지급할 것을 제안한다』 라는 저서를 출간하여 「국가 보너스 계획」의 제안을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1920년 영국의 노동당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국가 보너스 계획이 논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당시 대세였던 흐름, 즉 오늘날 ‘노동주의’라고 부르는 흐름을 극복하지 못한 채 거부되었고, 노동당은 완전고용과 이에 기초한 사회보험을 주요한 정책 방향으로 내세웠습니다. 사회보험과 완전고용을 기반으로 한 20세기 복지국가 체제와의 경합에서 밀린 것이지요.

이후 「베버리지 보고서」의 등장과 실현으로 밀너 부부와 피카드의 「국가 보너스 계획」은 거의 잊힐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현대 기본소득의 선구적 위치에 있음이 분명하고, 어떤 자산 심사도 없이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정의에 부합하는 계획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 회에는 콜(G. D. H. Cole)과 클리포드 더글러스(Clifford H. Douglas), 휴이 롱(Huey Long)의 기본소득 제안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 독일의 작가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1898~1970)가 1929년에 발표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설의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부상에서 회복한 후 다시 전선에 배치되어 결국 전사하고 맙니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 골렘(golem)은 성서와 탈무드에서 태아 상태거나 완성되지 못한 물체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 『밤 끝으로의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은 보통 셀린(Céline)으로 알려져 있는 루이페르디낭 셀린(Louis-Ferdinand Céline, 1894-1961)이 1932년 출판한 그의 첫 소설입니다. 본명은 루이 페르디낭 데투슈(Louis Ferdinand Destouches)이고, 프랑스의 작가이자 의사로, 이 작품으로 르노도상을 수상했습니다.

아! 동무여! 내 단언하건대, 이 세계는 이 세계를 조롱하는 거대한 사업체에 불과하다네! 그대는 젊어. 극도로 첨예한 이 몇 순간이 그대의 가슴속에 제발 여러 해 동안 간직되길 비네! 내 말 잘 듣게, 동무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살인적 위선을 찬연하게 장식하고 있는 그 중대한 몸짓, 즉 ‘불쌍한 사람의 생존 조건, 그의 운명… 등에 대한 동정’, 그 몸짓의 중대성이 그대의 폐부 깊숙이 침투하지 않은 채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도록 하게. - 『밤 끝으로의 여행』 중에서

○ 영국의 통화체계에서 1971년의 10진법 이전에는 파운드당 20실링, 실링당 12펜스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즉 ‘1파운드=20실링, 1실링=12펜스, 1파운드=240펜스’였습니다. (펜스는 페니의 복수형)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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