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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무엇인가 ㉒

기사승인 2021.04.29  14: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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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보충 2> 경제학과 경제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그리고 기본소득

이번 22회는 경제와 경제학에 대한 글입니다. 기본소득이 경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도 하지만, 경제와 경제학을 둘러싼 오해와 선입견, 무비판적인 수용이 대학원 강의실에서조차 난무하고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글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사과 말씀 드립니다. 특히, 항의성 연락까지 해주신 몇몇 독자분들께는 더욱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역사 ⑤ : 경제학과 기본소득의 만남」은 일주일 이내에 게재할 수 있도록 하겠고, 이후에는 늦어지는 일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하겠습니다. - 고영주

○ 꽤 유명한, 머리 좋은 바보들의 웃픈 실화

2007년에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는 2007년 4월, 미국 2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회사인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파산신청을 하면서 불거져 나왔습니다. 이후 미국의 초대형 모기지론 대부업체들이 연쇄 파산하면서, 미국만이 아닌 국제금융시장에 신용경색을 불러왔고, 전 세계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었지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2008년 11월, 경제학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런던 경제 대학(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아무도 이런 일을 예상 못 했지요?”

여왕은 똑똑한 경제학자들, 명문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따고 수학 방정식과 공식, 경제 법칙(?)과 정리들로 무장한 이 영리한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경제학자들이 빠른 성장과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는 마법의 공식을 발견했다는 얘기, 세계 경제는 잘 돌아간다는 소리를 반복해서 들었던 터였습니다.

또한 그 전에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인플레이션을 길들이고 경기 변동을 최소화시켰다는 이유로 ‘마에스트로’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뒤를 이은 벤 버냉키는 ‘대안정(Great Moderation)’을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여왕의 질문을 듣게 된 영국 아카데미는 2009년 6월 17일에 학계와 금융계, 정부 부처 등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경제학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7월 22일, 회의 결과를 정리한 편지를 여왕에게 전달했습니다.

이 편지의 일부를 살펴보면 “경제학자들 개개인은 유능하고, 나름대로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있었지만 금융 위기 직전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으며, “영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집단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시스템 전체에 끼치는 리스크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에 실패했다.”고 반성했습니다.

이들의 반성문(?)에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했다”는 부분은 일견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문장이 매우 바보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과거의 사례로부터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1980년대부터 영미권을 중심으로 ‘금융 탈규제’가 진행되었고, 미국은 1933년에 제정되었던 ‘글래스 스티걸법(Glass-Steagal Act)’을 1999년에 폐지했던 일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929년의 주식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상업은행의 방만한 경영과 이에 대한 규제 장치가 없었다는 점에 있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써 ‘글래스 스티걸법’이 제정된 것이었지요.

내용을 보면 연방준비제도의 강화, 연방예금보험제도의 창설, 지점망의 재조정, 예금금리의 상한 설정, 투자은행업무로부터의 완전 분리 등이었습니다. 그로써 기업이 발행하는 유가증권 인수업무는 투자은행에만 한정되고 상업은행에 대해서는 금지되었던 것이지요. 투기로 인한 폐해를 막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규제를 풀어버렸습니다. 규제가 풀린 금융 시장이 극단적인 이윤 추구, 즉 투기로 함몰될 수 있다는 점은 대공황이 주는 교훈에서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의 선조인 알프레드 마셜조차 이미 경고한 바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무리 기발한 금융 상품(여기서는 주로 돈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인 대출채권 묶음의 반복적인 판매와 재판매)일지라도 이것들의 수익 창출 여부는 최초로 담보대출을 했던 노동자들과 중소기업들이 대출 융자금을 얼마나 잘 상환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기본을 몰랐거나, 실물 자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파생상품들의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회피했을 가능성입니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울까요? 많은 피해자들이 마주했던 극단적인 절망감을 느낄 수 있긴 할까요?

이와 관련해서 생각하면 ‘집단적 상상력의 부재’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과거로부터 배운 것이 없다는 점의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이라 자칭했던 그들의 이론이 사실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이자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면피용이라는 점입니다.

○ 똑똑한 바보들의 ‘돈벌이’와 ‘양심’, 그리고 시치미떼기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을 먹여 살리는 수단으로는 무척 유용하다.”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주류경제학(신고전주의)이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되짚어보면 첫째 이유는 수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용어가 어려우며, 세 번째는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왕이라는 근거 없는 ‘미신’과 ‘우김질’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사실상 ‘수학’ 때문에 생겨난 오해일 가능성이 있고, 거칠게 얘기하자면 ‘물리학 선망증(羨望症, 부러워하며 바라는 병의 증상)’이라는 질병을 그 자신들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질병을 눈치챘던 사람들의 그나마 양심적인 ‘밥벌이’를 살펴보겠습니다.

경제학에 본격적으로 수학이라는 도구를 도입한 사람은 알프레드 마셜이고, 의도하지 않았으나 경제학 교과서를 수학으로 도배한 사람은 폴 새뮤엘슨(Paul Anthony Samuelson, 1915-2009)이며, 뒤를 잇고 있는 사람이 그레고리 맨큐(Gregory Mankiw)입니다. 맨큐는 우파적 기본소득 지지자이기도 합니다.

세 명의 공통점은 천재적이라는 것 외에 대학에서 배우는 경제학 교과서 가운데 최고의 베스트셀러 저자라는 데에도 있습니다.

마셜의 『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Economics)』는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는 고전이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현대경제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새뮤얼슨은 70년대와 80년대를 대표하는 『경제학원론(Economics)』의 저자입니다. 또 맨큐의 『맨큐의 경제학』, 『경제학원리』와 『거시경제학』 등의 저서는 90년대 이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한국의 많은 대학교에서도 맨큐의 책을 교과서로 채택합니다.

이들과 관련한 얘기는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 1898-1983)와 연결됩니다. 스파라는 『상품에 의한 상품생산』에서 마셜이 수학적 완전성을 위해 내세웠던 완전경쟁, 장기적 완전고용, 장기적 균형 성립 등의 가설이 근거 없음을 보였고, 이후 유명한 ‘케임브리지 논쟁’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케임브리지 논쟁’이라는 이름은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도시 케임브리지(Cambridge)에 있는 하버드 대학교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그리고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속해 있던 경제학 교수들 간에 벌어진 논쟁이어서 붙여진 것입니다.

논쟁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조안 로빈슨 여사와 피에로 스라파를 중심으로, 미국의 케임브리지에서는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의 폴 새뮤얼슨과 로버트 솔로 같은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심지어 수학자들까지 참전(?)하였다고 합니다.

논쟁의 세부 사항은 지나치게 어려우므로 최대한 쉽게(?)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경제학 교과서는 생산의 3요소를 토지, 노동, 자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생산함수로 가면 (산출량)=(노동량과 자본량에 관한 함수), 즉 Q=f(L, K)로 놓으면서 은근슬쩍 토지를 빼버립니다. 또한 자본투입량인 K도 고정값으로 바꾸어버립니다. 물론 장기 생산함수에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만일 ‘분배’라는 것이 생산(산출량)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결정되고 이것을 측정할 수 있다면, 노동자가 가져가야 할 몫과 자본가가 가져야 할 몫이 이 생산함수에 의해 수학적으로 정해질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됩니다. 즉 노동과 자본의 기여도에 대한 비율이 정해질 수 있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면, 분배를 둘러싼 노사갈등도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이질적인 자본재들에 각각의 가격을 곱한 것을 더해서 경제 전체에 주어진 자본량을 구하는 방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논쟁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쉽게 바꾸어 말하면, 산출량에 대한 자본의 기여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자동차 조립에 쓰인 나사못과 항공기 조립에 쓰인 나사못의 가격이 같다고 할지라도, 나사못이 완성된 자동차와 항공기의 가격에 기여한 바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며 서로 다른 부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때그때마다 다르다는 겁니다.

다시 어렵게 말하자면, 생산 영역에서 주어진 어떤 ‘수량적 양’이나 ‘수량적 관계’가 분배영역의 변수인 이윤율과 임금률을 결정한다는 논리는 틀렸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전적으로 주어진 수량적 관계나 양이 분배변수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실생활에서의 예를 들면, 자신의 월급(임금)이 경제학 교과서의 논리에 따라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공장 노동자의 임금(생산에 기여한 몫)이든 소방공무원의 임금이든 주류경제학의 논리인 수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무 당연한가요?

그런데 무수한 학자들이 주춧돌로 삼아왔던 자본재라는 개념이 고정적인 양을 측량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면 어찌 될까요?

우선 존 베이츠 클락(John Bates Clark, 1847-1938)이 한계생산성 이론에 근거하여 국민생산이 생산요소(토지, 노동, 자본)의 소유자들에게 소득으로 분배되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시도가 무너집니다.

또 자본량이 측정될 수 없다면 생산함수가 날아가고, 이어서 공급 곡선이 사라지며, 공급 곡선이 사라지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라는 개념이 사라집니다. 균형 개념이 없으면 가격과 수량을 설명해내는 일에 실패하며, 궁극적으로는 신고전학파의 이론 전체가 붕괴됩니다.

이 케임브리지 논쟁 이전에도 솔로는 총자본의 측정을 “순수주의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과제라 하였지만, 참담한 패배를 맛본 폴 새뮤얼슨은 자본 이론을 ‘우화(fable, 꾸며낸 이야기)’라고 인정했고, 찰스 E. 퍼거슨(Charles E. Ferguson)은 자본 이론을 믿고 안 믿고는 ‘신앙의 문제’라고까지 하였다가 양쪽으로부터 뭇매를 맞았습니다.

어쨌든 그 이후에도 새뮤얼슨의 책은 계속 교과서로 불티나게 팔렸고, 바통을 이어받은 맨큐의 책은 현재에도 베스트셀러입니다. 맨큐야 참전용사(?)가 아니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새뮤얼슨은 어땠을까요? 케임브리지 논쟁을 없었던 일처럼 모른 척하였습니다.

거의 자유방임주의자에 가까운 밀턴 프리드먼의 시카고 학파는? 마찬가지로 ‘없었던 일’로 하였습니다. 회피 전략, 즉 시쳇말로 ‘쌩 까기’ 전략을 구사하며 승승장구 하였습니다. 오히려 승자였던 영국의 조안 로빈슨 여사(Lady Joan Robinson, 1903-1983)의 사망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경제학과의 학풍이 신고전주의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이 있습니다. YTN의 2021년 4월 26일 ‘뉴스가 있는 저녁’에서 앵커 변상욱이 한 말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시치미 뚝 떼는 데에도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그나마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기업체와 연결된 주류경제학자들의 밥벌이 방법과 이론의 오•남용은 도가 지나칠 정도이니까요.

여담 한 가지. 새뮤얼슨은 이후 케임브리지 논쟁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으나 주류경제학에 맞선 폴 크루그먼과 조지프 스티글리츠라는 걸출한 경제학자를 길러내었습니다. 교과서 판매의 후계자였던 맨큐는, 수십 명의 학생들이 2011년 11월 2일 그의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 강의 중 ‘단단한 기초보다는 심하게 왜곡된 관점’을 제공한다며 그에게 공개서한을 보내고 수업을 나가버리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나마 맨큐가 한 다음의 말은 솔직해 보입니다.

“경제학자들은 과학자인 척하는 걸 좋아한다. 나도 종종 그러기 때문에 잘 안다.”

○ 분배, 기본소득 그리고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앞의 내용에서 전달하고 싶었던 내용의 첫째는 주류경제학자들이 잘난 척하지만, 실상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며,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논리와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편협한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그러함에도 그들의 이론이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도구가 될 때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무관심과는 다르게 말이지요.

우리나라로 한정하더라도 1997년 이후에 신용불량자가 된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파산한 사람들, 그리고 노동유연성 확보라는 명분 아래 해고당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처지는 신고전주의라는 주류경제학을 앞세워 빚어낸 참상이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분배든 재분배든 그것이 무슨 자연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인식, 법과 제도, 그리고 필요와 상황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영역이므로 기본소득 역시 주류경제학의 논리로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수학적 도구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긴 해야 합니다.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별것 없다. 주류경제학자들의 헛소리에 쫄지 마라!” 하지만 우리가 쫄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하고, 개념 정의만큼은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의 글은 세 명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책 『GDP는 틀렸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는 것이 경제 본연의 임무다. 경제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 조지프 스티글리츠, 아마르티아 센, 장 폴 피투시

이 글을 저의 관점에서 보자면, 경제의 목적은 ‘좋은 삶을 살아내는 것’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풀어서 다시 말하면, 경제라는 것은 ‘돈벌이’가 아니라 ‘좋은 삶을 살아내기 위한 사회적 수단과 방법 가운데 하나’이고, 경제학은 ‘돈의 흐름’을 좇는 학문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안된 방법론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고 했습니다. 기차가 불평등이라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때, 누군가는 그 기차를 멈추려고 하고 누군가는 불평등의 세상을 향해 더 빨리 달리기를 원합니다.

이때, “나는 누구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이야”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기술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며, 기차라는 발명품도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입니다. 하지만 그 기차에 실린 물건이 살상용 무기인지 구호품인지의 여부와 기차가 그것들을 싣고 어떤 곳을 향해 달리는지를 기준점으로 삼으면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개별 경제학과 경제 이론가들이 정의하는 경제도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경제학자들과 경제학 이론들도 중립적인 관찰자이거나 중립적인 이론가들이 아닙니다. 만일 백번 양보하여 가치중립적인 ‘순수 학문’을 표방했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중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GDP와 GDP의 성장(경제 성장)이 가치중립적이고 당연히 추구해야 하는 일일까요? 단언컨대, 그렇지 않습니다. GDP의 제작자 사이먼 쿠즈네츠(Simon Smith Kuznets)조차 “GDP만으로 한 국가의 복지를 추정하기는 어렵고, 그 나라가 행복한가를 측정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GDP로 대표되는 계량경제 지표가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GDP 역시 특정한 경향을 옹호하는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특히 GDP의 증가와 함께 불평등도가 같이 증가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불평등을 향해 달리는 기차 위에서 기차를 멈추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아마르티아 센 등이나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의 대부분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최소한 기차를 멈추거나, 조금이라도 역방향으로 움직여 가길 원하지요.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므로 우리는, 경제와 경제정책, 경제 이론에 관해서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누가 이득을 보는가?(Cui bono?)” - 루키우스 카시우스

<덧붙임>

○ 『GDP는 틀렸다』는 책은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세 명의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아마르티아 센, 장 폴 피투시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를 번역한 책입니다. 이 책은 GDP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새로운 지표를 제시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 GDP가 사람들의 행복을 측정하는데 최적의 지표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GDP는 틀렸다』에서 저를 사로 잡았던 문구는 “평균 소득은 증가하는데 생활이 더 팍팍해졌다면, 1인당 GDP가 증가할수록 불평등도가 증가한다면, GDP는 신기루다.”였습니다.

○ 경제학뿐만 아니겠으나 경제학 이론 가운데 왜곡•오용•남용된 사례는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GDP의 제작자이자 197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쿠즈네츠의 ‘쿠즈네츠 곡선’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왜곡•오용•남용된 사례들을 소개하고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무척 흥미로운 주제입니다만 ‧‧‧.

○ 그렇다면 신고전주의의 수학적 도구가 완전히 무용하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결함이 없는 사회과학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 하나는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쓰임새를 일정한 범위 내로 한정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가장 유용하게 쓰일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그 이론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살피는 일이겠습니다. 그것이 공동체 구성원들을 해하려 하는지, 유익하게 하려 하는지를요.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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