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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가능한가 ㉗

기사승인 2021.06.04  1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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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1) 기본소득이 넘어야 할 벽들 ① :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는 낡은 것들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 호르헤 산타야나(Jorge Santayana, 1863-1952)

○ 낡은 생각을 지키는 방법과 기본소득의 쟁점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정치의 영역에서 다시 기본소득이 화두가 되고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또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은 열심히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주장할 터이고, 반대론자들은 그에 맞서 불가한 이유를 내세울 겁니다.

또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생각에 따라 찬•반 여부가 갈리기는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 반대론자들의 논리는 앨버트 허시먼(Albert O. Hirschman, 1915–2012)이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The Rhetoric of Reaction)』에서 좋은 세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세 가지 논리(명제)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허시먼이 200년 이상의 역사를 연구하여 정식화한 세 가지는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입니다.

‘역효과 명제(perversity thesis)’는 새로운 시도가 엉뚱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래 봐야 너만 힘들어진다”라고 말하는 것 등을 일컫습니다.

특히 주류경제학자들,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최저임금법안 등을 반대할 때 많이 썼던 논리입니다. 최저임금법안이 시장을 왜곡해서 역효과를 불러온다고 했었습니다. 자기네들이 보기에 전능한 유토피아인 ‘자기 조절적 시장(Self-regulating Market, SRM)’에 국가가 개입하는 그 어떤 행위도 역효과가 난다며 반대했었다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12년 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중이지요.

‘무용 명제(futility thesis)’는 사회 변화와 개선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이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래 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회적 차원의 말이나, “백날을 해봐라,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는 개인적 차원의 언명을 말합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것이며, 변화에 대한 시도는 늘 허사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위험 명제(jeopardy thesis)’란 변화나 개혁에 드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의 소중한 성취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라든지 “복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 빨갱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얘기합니다. 위험하다는 인식을 심어 사람들의 두려움과 무서움, 즉 공포를 자극하는 방식이지요.

허시먼이 제시한 세 가지 반동(reaction) 명제들인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를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가 누군가의 의견에 반대할 때 했거나 또는 우리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얘기들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의 어법과는 다르게 더 중요하게 짚어야 할 점은, 허시먼이 굳이 반동(reaction)이라 표현한 바와 같이, 이 명제들을 내세우는 이들은 현재 상황에서 더 이익을 얻을 수 있거나, 현재가 불만족스럽지 않은 이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기본소득을 공부하며 접했던, 반대론자들의 논문 내용이나 토론회에서 내세우는 논리 또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두고 그 개인의 도덕성을 거론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지향점이 다를 수 있는 법이고, 게다가 변화는 누구에게나 귀찮음과 두려움을 안겨주니까요.

어쨌거나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은 이 세 가지 반동 명제들과 싸우고 있으며, 관련한 가장 큰 쟁점은 세 가지입니다. 윤리적 정당성, 정치적 실현 가능성, 재정적 실현 가능성이 그것입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 세 가지 외에 ‘기존 복지제도와의 양립 가능성’을 추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쟁점들은 일정 정도 이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노동 윤리(labor ethics)’를 내세운 ‘윤리적 정당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기본소득의 원칙 가운데 ‘무조건성’에 대한 것이고, 쉽게 말하자면 ‘일도 하지 않는데, 공짜로 주는 것이 맞냐?’는 문제의식이지요.

‘기본소득은 무엇인가 ⑮’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기본소득은 ‘자산 조사나 일에 대한 요구 없이’ 지급되어야 함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기존의 ‘노동 윤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노동 윤리는 생각보다 워낙 강력해서 20세기 복지국가 건설, 심지어는 지금은 사라진 공산국가 소련의 건국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현재의 사회보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1980년대 신자유주의 광풍 이후 복지와 노동을 연계하거나 노동을 복지의 전제조건으로 하는 생산주의를 지배적 원칙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노동 윤리라는 것의 정체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등장했는지, 우리가 실제로 노동 윤리를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노동 윤리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없는 것인지, 큰 틀에서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지요.

○ 가장 낡은 교훈인 ‘노동 윤리’에 대한 직관적 의문들

‘노동 윤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근면 성실’일 것입니다. 또 ‘노동은 신성하다’라든지, ‘노동은 존엄하다’ 등의 말도 떠오릅니다. 연관된 교훈은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자격이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저 사람이 가난한 것은 게을러서 그렇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등의 흔하디 흔한 말로 표현됩니다.

이런 말들이 옳다면, 노동은 경제적 필연이자 사회적 의무, 개인의 도덕적 실천이자 윤리적 의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생각들이 현실과 맞아 떨어질까요? 저의 결론은 “어떤 경우에는 맞기도 하다. 그렇지만 대부분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런 의문들 때문입니다.

만일 노동이 신성하고 존엄하다면, ‘노동 윤리’가 한 점 흐트러짐도 없는 정의가 맞다면, 불로소득과 불로소득자들에 대한 칼날같은 비난과 저항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불로소득을 꿈꾸고 불로소득자들을 부러워하며,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기회를 붙잡고 싶어 하지요.

만약 노동 윤리가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왔다면, 자본주의 시작 이래 벌어졌던 수많은 투기 열풍(네덜란드 튜울립 사건, 영국 남해회사 사건, 부동산 투기,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 투기 열풍 등)과 뒤이은 파산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질 지경인 이야기, 요즘 청소년들의 꿈이 ‘건물주’라는 사실을 두고 진심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일까요?

또 만일 노동이 그렇게 신성하고 존엄하다면, 역사상의 지배계급들과 부자들은 생산적 노동을 왜 그렇게도 멀리했을까요?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자격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불로소득자들이 생겨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부자들에게는 ‘너희들은 일하지 않으니 먹지도 말아라’라고 얘기를 하지 않는 걸까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 왜 다들 청소부는 업신여기면서 판검사 앞에서는 주눅 들어 할까요? 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을 적게 받고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까요? 부자들이 훨씬 더 많은 여가와 사치를 즐길 때는 ‘저 사람이 부유한 것은 게을러서 그렇다’는 말은 왜 하지 않을까요?

불편함을 무릅쓰고 의심(의문) 하나를 또 제시해보겠습니다. “소위 ‘분노 조절 장애’를 가졌다는 사람들 가운데, 마동석이나 강호동처럼 힘센 사람에게 덤벼들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노동 윤리가 향하는 곳이 ‘위’가 아니라 ‘아래’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거나 자신보다 약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내뱉는 습관적이고 위계적인 언행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만 의문을 제기하고 나면 허전함이 남습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얘기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차근차근 노동 윤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노동 윤리의 탄생

버트런드 러셀이 노년에 TV 인터뷰에서 후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요청에 응답한 말을 먼저 소개하고, 노동 윤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무엇인가를 탐구하거나 철학적인 사유를 할 때는 무엇이 사실인지, 그리고 그 사실이 가리키는 진실이 무엇인지만을 생각하라.”

제가 보기에 현대에 이르러서도 노동 윤리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심리적 ‘지체(遲滯,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발달이나 사회적 진전이 늦는 것)’ 현상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지체’가 계속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노동 윤리’의 이면을 살펴보지 못했거나, 변화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생계 수단으로서의 노동’이라는 부분적인 개념으로 노동 윤리 전반을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의 심리적 경향에도 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인류학적 성과들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삶의 방식이 ‘근면’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수렵•채집인들의 삶과 그들의 사회가 그러하였습니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기 동안 생존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넘어서는 일은 없었던 것이지요. 노동시간을 늘어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식량 생산’입니다. ‘농업 혁명’이라고 불리지요.

그런데 이 ‘농업 혁명’이 동시대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농업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고고학자들을 필두로 한 인류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리지만, 이에 대해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농업 혁명은 최고의 사기”라고 단언할 정도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곡물, 특히 밀을 키우기 위해 등골 휘어지도록 밭에서 노동해야만 했던 상황, 곡물 편식으로 인한 영양 불균형과 흉작시의 영양실조, 정주생활과 가축 사육으로 인한 전염병 발병, 불평등 체제의 등장 등 여러 측면에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재차 노동량이 더 늘어나고, 노동 윤리까지 탄생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적합한 설명은 수직적 위계 구조의 탄생입니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7500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추장 사회’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구 규모가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렀던 추장 사회에서 소위 ‘도둑 정치’라는 것이 생겨났다는 것이지요.

대체 무엇을 훔쳤길래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때의 도둑 정치가들의 행태를 ‘도둑 정치’라고 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사람들의 노동력과 여가 시간 그리고 잉여생산물도 포함됩니다. 이 도둑 정치는 무력의 독점과 중앙집권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것은 노동 윤리의 탄생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격화하거나 신의 혈통임을 내세웠고, 정해진 의식을 통해 비, 풍년, 풍어 등을 불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고, 스스로 노동이 면제된 자들(발터 샤이델의 용어로는 ‘최초의 1%’)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훔쳤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이었습니다.

즉 추장 사회 이후의 지배계급인 전사 계급과 사제 계급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까지 노동에서 면제되었고, 이들이 노동에서 면제된 만큼 사회적 생산량을 유지•증대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든, 그들의 권위를 확장시키는 측면(예컨대 신전 건립이나 대규모 토목 공사 등)이었든, 나머지 사람들의 노동량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력만을 사용하여 노동을 착취하고 여가시간을 탈취하는 것은 일회적이거나 저항을 불러오게 되므로 효과적이지도 영속적이지도 않다는 엄청난 단점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노동 윤리’입니다.

‘노동 윤리’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근면(勤勉, 부지런히 일하며 힘씀)’은 보통 사람들이 자발성을 갖고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내면화시키는 작업이었고, 지배계급의 권위를 강화•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수직적 위계 구조의 꼭대기에 섰던 사람들을 현대적 용어로는 유한계급(有閑階級, The Leisure Class)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소스타인 베블런이 정의한 유한계급, 즉 생산적 노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소유한 자산으로 비생산적 소비 활동만 하는 집단의 원조는 최초로 ‘노동 윤리’를 강요한 자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동 윤리’의 내면화를 강요했던 ‘유한 계급’이 스스로 내면화했던 인식들이야 어떤 시대와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나타납니다만, 영국의 작가 아서 영(Arthur Young, 1741-1802)이 했던 다음의 말은 그들의 인식을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낮은 계급은 계속 가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부지런을 떨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보 빼고 누구나 안다.”

<덧붙임>

○ 『The Rhetoric of Reaction』을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으나 이를 ‘반발(반작용)의 수사학(말장난)’, ‘반동의 수사학’쯤으로 옮겼어도 무난할 듯 하였습니다. 다만, ‘보수(保守)’를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 정도로 해석한다면, 허시먼이 얘기한 보수주의는 정치적 범주를 벗어나 더 포괄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옮긴이 이근영은 물리학에서는 ‘action/reaction’을 ‘작용/반작용’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일반적인 용어인 ‘움직임/반동’이 글의 뜻(文意)에 더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 「가장 낡은 교훈인 ‘노동 윤리’에 대한 직관적 의문들」에서는 조금 도발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이해도가 지금보다 많이 낮았을 때 겪었던 경험들에 있습니다.

○ 다음 글에서는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 윤리’와 ‘노동 윤리에 대한 이중적 태도’ 등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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