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 삼아 읽는 경제 이야기 : 화폐 ⑤
◐ 쉬운 질문, 그러나 너무나 어려운 해답 찾기
화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물음은 『돈의 본성』의 저자이자 화폐의 대가인 제프리 잉햄(Geoffrey Ingham)조차 ‘수수께끼’라는 말을 쓸 정도로 어려운 대답을 요구합니다.
화폐란 권력이면서 권력의 작동방식이고, 사회적 기술이며, 생존을 위한 경제적 투쟁의 결과로 볼 수도 있고, ‘제도적 사실’이면서 신용/채권이며, 사회에 대한 청구권이기도 하고, 화폐 그 자체가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개념을 간단하게 담아낼 방법이란 게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죽했으면(!) 거시경제학의 창시자이자 화폐의 대가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세상에서 화폐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단 세 명만을 꼽았겠습니까! 그 세 명이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가운데 한 명, 외국대학의 교수 한 명, 영란은행(잉글랜드 은행)의 젊은 직원 한 명을 말합니다만, 그저 비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다음의 고통스러운 언명은 1844년 영국에서 ‘필 은행법(Robert Peel’s Bank Act)’ 제정 전후로 벌어졌던 영국 의회의 논쟁 과정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랑에 빠져 바보가 된 사람보다 화폐의 본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가 바보가 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화폐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 즉 화폐의 본성을 정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말이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죠.
금본위제는 1821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행되었는데, 이 ‘필 은행법’으로 해서 ‘금본위제’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하지만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결론을 내릴 수가 없는 문제였던 것이고, 이후 10년 주기의 금융공황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다만, 지금의 주류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상품화폐론’이 하나의 가설이자 이데올로기로써 승리한 사건일 뿐이었던 거죠.
금본위제와 필 은행법을 두고 훗날 칼 폴라니는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되는 화폐까지 상품으로 전락시켰다고 한탄했습니다만, 필 은행법 이후에도 화폐의 본성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오죽했으면 본질을 회피하는 눈가림용 결론까지 등장했을까요.
◑ 화폐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 나온 눈가림용 처방
화폐를 검색하면 사전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상품의 교환 가치를 나타내고, 지불의 수단과 가치의 척도 및 저장과 축적의 수단이 되는 금화, 은화, 주화, 지폐, 은행권 따위의 돈”으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정의만으로 만족하시나요? 만족하셔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만,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짜로 궁금한 사람에게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화폐①’에서 언급했듯,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온전치 못한 ‘화폐에 대한 정의’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눈 가리고 아웅’한 일이 불러온 비극적 결말이었습니다.
각설하고, 위의 사전적 정의는 1878년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논쟁에 싫증이 난 미국의 경제학자 프랜시스 워커(Francis Amasa Walker)가 “화폐란 바로 화폐가 하는 일이다”라며 화폐의 기능을 설명했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화폐의 본성에 대해 정의 내린 것이 아니라 화폐의 기능 네 가지를 엮어 마치 정의처럼 말했던 것에 불과한 거죠. 일종의 눈가림용이고 잠시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랬음에도 프랜시스 워커가 정리한 네 기능은 지금도 고스란히 경제학 교과서인 ‘화폐금융론’에 실려 있습니다.
◐ 화폐의 네 가지 기능
1878년에 워커가 제시한 네 기능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화폐란 바로 화폐가 하는 일이다”라며 얼버무리긴 했어도, 이 네 가지 기능을 기억하는 일은 ‘화폐의 기원’과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 가치척도(measure of value) 또는 계산화폐(money of account) : 가치 측정과 경제적 계산을 위한 수리적 척도, 재화와 채무계약의 가격 책정, 소득과 부의 기록
■ 지불수단(a means of payment) : 동일한 계산화폐로 값이 매겨진 온갖 부채를 청산하기 위한 것
■ 교환의 매개물(a medium of exchange) : 다른 모든 상품들과 교환될 수 있는 것
■ 가치의 저장(a store of value) : 구매력과 채무 청산력의 저장소로서 소비와 투자의 이연(移延, 시일을 차례로 미루어 나감)을 가능하게 하거나 단순히 ‘미래에 닥칠 수 있는 곤궁’에 대비한 저축
설명을 위한 말들이 조금 어렵긴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요?
우선 주류경제학의 ‘상품화폐론’은 네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환의 매개물’이라는 기능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환의 매개물로서의 상품화폐가 자연발생적으로 가장 먼저 등장했고, 나머지 기능들은 부차적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 상품화폐는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언급했듯 쇠못과 마른 대구처럼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라는 두 가지 목적에 모두 부합하는 상품이 교환의 매개물로써 등장했다는 근거 없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또 이 논리는 “인간은 물건을 갖고 다니며 유익한 것과 교환하려는 본능적 성향이 있고, 그런 이유로 물물교환을 하는 시장을 만들어 교환을 하였으나,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아주 ‘중립적인’ 교환의 매개 수단인 ‘물건 화폐’를 발명하였다.”는 날조된 추정의 연장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상품화폐론’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도록 하겠습니다만,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네 가지 기능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 기능들은 합쳐졌다가 분리되기도 하고, 떨어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화폐는 네 가지 기능을 두루 갖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역사적 증거는 ‘계산화폐’가 가장 먼저 등장했고, ‘계산화폐’로서의 기능이 가장 중요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을 계산하기 위해서였을까요?
◑ 화폐의 기원 : 인명 보상(wergeld) 또는 인명의 가치에 대한 속죄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화폐학을 담당했던 필립 그리어슨(Phillp Grierson)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1977년 『화폐의 기원(The Origins of Money)』이라는 책을 출간했고, 화폐의 기원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입니다.
그리어슨은 이 책에서 화폐의 기원은 ‘시장의 물물교환에서 화폐가 출현했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인명 보상(人命補償, wergeld)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개진합니다. 조금 뜬금없죠?
여기서 인도유럽어족의 단어 ‘wergeld(인명 보상)’는 ‘wer(사람)’와 ‘geld(지불, 돈)’에서 나온 말이고 ‘가치 지불(worth payment)’이나 ‘인명의 가치’와 같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목숨값’ 또는 ‘핏값’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고, 말 그대로 사람의 살해에 대한 보상이었다는 거죠.
또 이것은 손, 손가락, 손톱 등 신체의 모든 부위에 대한 보상으로까지 발전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공중 회의에서 상해의 종류에 따른 인명보상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명 보상 체계는 왜 필요했으며, 왜 이것을 화폐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다음 회에 계속>
고영주 / 거제경실련 정책위원장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