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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재발견 - 서불(徐市) ‘거제 다녀감’

기사승인 2019.07.12  17: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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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찾겠다 불로초’ 거제 온 서불 탐험대, 서불과 동남동녀 거제 바다서 노닐다

‘못 찾겠다 불로초’ 거제 온 서불 탐험대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신의 영역인 불사(不死)를 꿈꾸며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인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사방으로 보냈으나 구하지 못하고, 기원전 219년 서불이 나서 불로초를 구하러 한반도를 향해 떠난다.

기원전 255년 제(齊)에서 태어난 서불(徐市) 또는 서복(徐福)은 연단술(燃丹術 = 불로장생의 약을 단을 만드는 기술)로 불로장생하겠다는 뜻을 굳힌 방사(方士 =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그의 36세에 불로초를 구하는 뱃길에 올랐다.

서불은 중국을 떠나 황해를 건너 함양과 남해, 거제, 제주를 거쳐 일본까지 불로초를 구하는 여정을 떠났고 2200여 년이 지난 현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 수많은 관련 전설을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에 ‘서불 다녀감’이란 뜻의 ‘서불과차’ 글씨가 새겨졌다고 전해오는 곳은 서해안 부안의 적벽강, 함양군 마천면 삼봉산(서암동), 남해 양아리 석각, 통영 매물도 글씽이굴, 남부면 해금강 우제봉, 제주도 정방폭포 등이다.
특히 거제지역에는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간 곳, 서불이 그네를 뛰던 곳, 서불이 짐을 풀고 쉬어 간 곳, 서불의 일부 후손이 남은 곳 등의 전설이 남아있다.

그중 서불이 불로초를 찾다 ‘서불과차(徐市過此)’를 새겼다는 해금강 우제봉 석각은 지난 1959년 9월 불어온 ‘사라호 태풍’에 떨어져 현재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상태로 변해 거제의 서불 전설은 남해나 제주도의 전설에 비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불이 거제를 다녀간 추억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난 2006년 일본에 남아 있는 서불 유적지 중 하나인 야메시와 우호협력을 맺었고 2012년 거제시와 야메시가 자매결연할 수 있도록 교량 역할을 했다.

또 2007년 서복유숙연구회 창립과 서불유숙지 표지석(와현마을 매미공원 내)을 세우고 최근 까지 매년 한?중?일을 오가며 꾸준한 학술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거제지역에 남아 있는 서불의 흔적을 연구하고 발표해 거제지역에 서불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한중일 학계가 모두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이뤄 냈다.

하지만 거제지역은 서불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자원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타 지역과 달리 문화자원의 중요성을 인식 못하고 서불을 활용한 관광 콘텐츠 사업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모양새다.
이미 서불과 관련된 전설을 자원으로 관광 사업에 뛰어든 제주도나 함양군에 이어 최근에는 인근 통영시가 내년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인 영화 ‘서복’ 제작사와 협약해 장소를 제공하고 향후 서불 관련 콘텐츠를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서불과 동남동녀 거제 바다서 노닐다

비록 서불이 거제에 다녀갔다는 물증인 해금강 우제봉 석각은 사라진 상태지만, 거제지역엔 서불과 관련된 지명은 물론, 석각이 존재했을 당시 석각을 직접 보고 기록으로 남긴 문헌이 증거로 남아있다.

경상우도 육군 대장 조익찬(曺益贊)은 1870년대 ‘갈도(葛島)’라는 한시를 통해,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은 1881년 거제지역 유배 중 ‘갈도석각가(葛島石刻歌- 문집 가오고락 中)’에 그 기록을 남겼다.

이유원의 경우 유배에서 풀려 난 뒤 지은 기성죽지사(岐城竹枝詞)에 해금강 우제봉 석각을 탁본했다는 기록을 남겼지만 현재 남아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 밖에 1849년 거제로 유배 온 조병헌은 ‘증최생명식(贈崔生明植)’에서, 영남지역의 유명 유학자였던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은 한시 해금강(海金剛)을 통해 해금강에 서불의 석각이 있다고 기록했다.

서불 왔다 감(서불과차) = 우제봉은 해금강 마을의 땅끝(串)에 해당하는데 그 절벽 아래에 ‘徐市過此’란 글자가 새겨 있었다고 한다. 이 글자가 새겨진 부분은 1957년의 사라호 태풍 때 떨어져 나간 것으로 열렸다.

글자는 150m 높이의 우제봉 절벽 중간 지점인 100m 정도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도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절벽에 위치한 탓에 배편을 이용해 바다에서 절벽 아래로 접근해야만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서불 관련 글씨는 사실상 남해 상주리 석각이 유일한데 이 석각은 세로 50㎝, 가로 100㎝ 규모로, 해금강의 석각은 이보다 훨씬 웅장한 규모였다고 한다.
또 예부터 우제봉은 기우제를 올린 곳으로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영험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서불 그네(사자바위) = 해금강 마을 주민들은 우제봉을 ‘서가람산(徐伽籃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가람(伽藍)’은 승려가 불도를 닦는 숲 등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불이 해금강의 절경에 반해 은둔한 곳이란 전설이 있다.

해금강 마을 앞에는 사진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일출을 장면을 위해 찾는 일출 명소 사자바위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사자바위를 굴레섬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네에 대한 방언으로 그네·그늘·근네·근데·근지·구네·군네·구누·구눌·군두·군대·구리·굴리·굴레·굴매·군기·군서·굴지·궁구 등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자바위와 해금강의 천년송이 있는 바위 사이에는 서불과 동남동녀가 그네를 만들어 놀았다고 한다.

짐 풀고 좀 쉬어가자(서불유숙지 누우래) = 일운면 와현은 고려시대에서 조선 중기까지 ‘눌일몰(눌이실)’, ‘눌일곶리’, 고개 이름은 ‘눌일티(누울고개)’, 뒷산 망대 명칭은, ‘눌일곶망’ 등으로 불렸다. 조선중기부터 현재까지 와현마을의 지명은 ‘와일포, 와현, 누우래, 눌일곶리’등으로 사용되다가 ‘눌일(訥逸)’이 ‘와일(臥一, 臥逸)’, ‘와현(臥峴)’으로 변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1778년 승정원일기에 경상도 거제부 둔전에 관한 보고서 중, ‘눌일포에서 와일포’로 지명이 바뀐 기록이 있다.

와현은 서불 일행이 유숙한 곳으로 추정되는데, 와현 마을은 해금강에서 동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해안마을로 육안으로 해금강이 훤히 보이는 곳이다.

와현의 옛 지명인 ‘누우래’는 ‘눕다’에서 파생된 말로 유숙을 의미하는데 서불의 유숙으로 ‘누우래’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서불의 후손 거제에 남았나?(서밭몰) = 지난 2012년 거제서복유숙지연구회가 발간한 ‘창립5주년 기념 거제서복연구’에 따르면 일운면 지세포와 와현 고개 아래에는 ‘서밭몰(서전 마을)’로 불린 지명이 있다.

서밭몰을 풀이하면 ‘서 씨가 밭을 경작하던 마을’로 풀이되는데, 서복유숙지연구회는 서불이 와현에 유숙할 당시 일부 인원이 머물다가 서불 일행이 다음 행선지로 옮겨갈 때 함께 떠나지 않고 정착해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 증거로 지세포 회진(會珍)마을에 남아 있는 청동기 유적인 ‘지세포 고인돌’이 서불과 관련된 유적 일 수 있다고 추정하고 지난 2011년 거제서복유숙지연구회 고문이자 일본의 고고학자인 아카사키 토시오 박사가 주변 유물 일부를 수습해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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