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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생각하다 ⑨

기사승인 2021.02.01  08: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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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2. 인간사회의 불평등

 4) 불평등의 이유 ② : 불평등 추세와 주류경제학

○ 불평등에 대한 인식과 저항

2011년 9월 17일, 뉴욕증권거래소(NYSE) 인근의 즈카티 공원(Zuccotti Park)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를 구호로 내건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위대는 미국을 경제위기에 빠뜨리고도 수백만 달러의 퇴직금을 챙겨 떠나는 월가의 최고경영자들에게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최고부자 1%에 저항하는 99% 미국인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했고, “미국의 상위 1%가 미국 전체 부의 50%를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매일 아침 일어나서 방값 걱정,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외쳤지요.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인 미국, 그곳의 중심지인 월가에서 벌어진 불평등 반대 시위가 전세계 1500여개의 도시로 번졌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입니다.

○ 전세계 부의 불평등

2013년 기준으로 상위 1%는 전 세계 부의 43%를 차지했고, 2016년에 상위 1%는 전 세계 부의 50.1%를 차지했습니다. 이 기간 하위 80%의 부는 6%에서 그 아래로 떨어졌습니다.(옥스팜에서 발표한 이 부분은 정확한 통계치라 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의 끝부분 <참고>를 봐주십시오.)

위 통계치의 기초를 제공한 ‘크레디트 스위스(Credit Suisse)’는 “전 세계적으로 자산가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면서, “기존 자산가들의 부는 줄어들지 않는 반면, 경제성장으로 새로운 부가 만들어지면서 새로 자산가가 된 사람들이 증가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장기적 추세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전후 미국 경제 팽창기의 소득 분배 구조 변화(Pavlina R. Tcherneva’s Calculation based on Pikkety/Saez data and NBER, from ‘Growth for Whom?’, Leby Economics Institute One-pager, no.47)’입니다.

이에 따르면 1949년에서 1953년까지 발생했던 ‘소득증가분’ 가운데, 상위 10%가 전체의 20%를 가져갔고, 하위 90%가 80%를 차지했습니다. 이 격차는 점점 줄어들다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1982년과 1990년엔 상위 10%는 80%를, 하위 90%는 20%를 가져가는 대역전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득증가분에 대한 2009년에서 2012년 구간에서는 상위 10%가 117%를, 하위 90%가 –17%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상위 10%가 하위 90%의 소득증가분까지 탈취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는데, 총수요가 민간 부분의 부채에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왜 한국은 말하지 않냐?’라는 분은 <참고>를 봐주세요.)

○ 불평등과 주류경제학자(신고전학파)

불평등의 이유이자 현상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부(富)의 분배’가 고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터무니없이 많이 가져가고, 누군가는 너무 적게 배당받는다는 거지요. 루소의 방식으로 얘기하자면 두 가지 불평등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에 의해 확대‧강화된 까닭입니다.

여기서 먼저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 1842-1924)의 분배이론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셜은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본 이름일 것입니다. “경제학은 대중들의 경제적 복지를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든지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라는 말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마셜은 심지어 ‘경제학을 만든 사나이’로 불리기도 하고, 신고전학파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셜의 책 『경제학 원리』를 읽으면서 판단한 내용은 통념과 많이 다릅니다. 이것을 소개하는 까닭은 주류경제학자들의 ‘의식의 밑바탕’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마셜의 ‘분배이론’의 ‘도덕적 결론’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언명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말하곤 하는 ‘만물은 스스로의 수준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라든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치에 꼭 맞는 것만큼 벌게 되어 있다’는 속담과 아주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경제학 원리2』

‘만물은 스스로의 수준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라는 말은 귀족, 사제, 평민, 노예 등 신분제 사회의 계급에 따라 분배수준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셜이 살았던 시기는 소위 ‘부르주아(그냥 단순히 자본가계급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라는 신흥 계급이 등장했고, 신분제가 해체되고 있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치에 꼭 맞는 것만큼 벌게 되어 있다’는 글을 전체 글의 맥락으로 보면, 하루 14시간 일을 하고 빵 한 덩어리 살 돈을 일당으로 받는 사람의 가치는 고소득 불로소득자의 가치에 비해 ‘손톱 밑의 때’ 수준에 불과하다는 인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임승차자들의 거대한 불로소득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마셜은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새뮤얼슨(Paul Anthony Samuelson, 1915-2009)과 함께 그나마 ‘정직한 편’에 속했던 주류경제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경제학 원리』에 서술된 그의 고백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엄청난 규모의 부는 많은 경우에 진정으로 건설적인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투기로 획득된다. 그리고 이러한 투기는 대부분 반사회적 전략, 심지어 일반 투자자들의 길잡이가 되는 정보원의 악의적인 조작과 관련되어 있다.”- 『경제학 원리2』

○ 주류경제학에 관한 의문

대학(어쩌면 요즈음엔 고등학교)의 경제학 교과서에서 완전경쟁시장, 수요와 공급 곡선과 무차별곡선 따위를 배우다 보면 ‘이것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고지식한 모범생 스타일이거나, 유행하는 말로 ‘나이브(naive)’한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질문들입니다.

“완전경쟁시장이 성립하려면 참여 주체들이 시장의 모든 정보를 다 알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 ㉠

“그렇다면 경제 행위의 주체인 수요자와 공급자는 ‘호모 이코노미쿠스(합리적인 경제적 인간)’여야만 하는데, 그런 사람이 현실에 존재하나?” ‧‧‧‧‧‧ ㉡

“경제는 ‘생산’과 ‘분배’라는 두 축을 기본으로 하는데, 우리는 교과서에서 ‘분배이론’을 제대로 배우고 있나?” ‧‧‧‧‧‧ ㉢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문제라는데, 노동 공급의 탄력성 회복을 위해 ‘경제학(주류 경제학)학과 교수’들에게 ‘일용직 교수’나 1년 단위의 ‘계약직(비정규직) 교수’ 자리를 제안한다면 받아들일까?” ‧‧‧‧‧‧ ㉣

㉠과 ㉡의 답은 ‘가능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의 가정은 ‘정보의 비대칭성’만 인식되어도 사라집니다. ㉡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알렉산더 사이먼(Herbert Alexander Simon, 1916-2001)의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제한적 합리성’이라는 개념과 훗날의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의 행동경제학 이론 등에 의해 설 곳을 잃었습니다.(기본소득을 생각하다② 참고)

제가 보기에 경제학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고민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렇다면 ‘생산’과 ‘분배’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왜 주류경제학에는 ‘분배이론’이 없다시피 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었는데 논쟁 과정에서 시쳇말로 ‘개박살이 나서’ 사라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전학파의 ‘임금기금설’이고, 신고전학파 ‘존 베이츠 클락(John Bates Clark, 1847-1938)’의 ‘한계 생산성 자본 이론’은 ‘케임브리지 논쟁’ 이후 경제학 교과서에서 사라졌습니다. ㉢에 대한 짧은 해설이었습니다.

㉣과 ‘케임브리지 논쟁’은 만일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주류경제학 교수에게 물어서는 안됩니다. 일종의 ‘금기어’입니다. ‘경제공황’의 원인이나 ‘예측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안됩니다. 그들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케임브리지 논쟁’은 배우지 않아서 그들이 모를 수도 있고, 안다면 질문자를 싫어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자유시장 경제이론의 정체는?

사실 주류경제학의 이론들이 특수한 경우와 특별한 가정하에서만 성립해서 일반화가 불가능하다거나 가정이 틀렸다거나 하는 증거들은 차고 넘칩니다. 프랑스 대학생들이 ‘자폐증 말더듬이(autism)’이라 조롱하며 주류경제학 교과서를 불태워버렸던 것처럼 이론적 파산은 명백합니다.

칼 폴라니(Karl Polanye, 1886~1964)가 이미 “자기조정 시장이란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라고 갈파했거니와, 자본주의의 장기적 추세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시장을 통한 분배와 균형의 달성’이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실증(實證)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공평한 분배의 방법은 그곳에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이 가르쳐지고 있고,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주류경제학 이론이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즉 권력자인 자본가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록펠러 가문이 시카고학파의 뒷배경이 되어 신고전학파의 이론을 자신들의 방어용 이데올로기로 활용했던 예에서 보듯이, 자유시장주의는 인간사회에 불평등체제가 들어설 때처럼 그들의 제도적•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수단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시장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어떤 방법으로 실행하는지를 알아보는 일입니다. 앞서 소개한 알프레드 마셜의 글에 많은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참고>

○ 이 자료는 ‘Credit Suisse(1856년에 설립된,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금융기관)’가 매년 발표하는 「Credit Suisse Global Wealth Report」를 참고하여 옥스팜(OXFAM)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 원자료가 40개국의 서베이(survey)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추정치(조세자료 등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조사 대상에게 “얼마쯤 버냐? 자산이 얼마쯤 되냐?”하고 ‘객관식’이든 ‘주관식’이든 물어봐서 알아냈다는 뜻입니다.)이므로 정확성을 담보할 수는 없으나 추세를 판단하는 데는 유용해 보입니다. 이 40개국은 대개 OECD 회원국과 G20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Membership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 따라서 전 세계 모든 국가를 포함할 경우의 비율은 옥스팜의 주장보다 부의 집중도는 더 높을 수 있습니다. 또 서베이 자료라는 점에서 Membership을 갖고 있는 한국의 상위 1%의 부의 집중도는 과소평가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 Credit Suisse는 ‘부’를 가계의 금융 자산과 실제 자산(주로 주택)에서 부채를 뺀 가치로 정의합니다. 2016년 상위 1%의 부는 「Credit Suisse Global Wealth Datebook 2019, Table5-1 World wealth inequality, 2000-19」 에서는 45.2%이고, 2019년은 45.0%입니다.

○ ‘왜 한국의 통계치는 말하지 않냐?’라는 물음에 대한 변명의 첫째는 한국의 통계자료가 부실하거나 애써 밝히지 않으려 하는 데에 이유가 있습니다. 둘째는 미국의 불평등 추세를 가장 근접해서 따라가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언급입니다. (만일, 누군가 원하시면 자료를 찾아보고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경제에서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은 인류 역사 전체에서 딱 세 가지만 있습니다. 전통에 의한 생산, 명령에 의한 생산, 시장에 의한 생산입니다. 이 가운데 경제의 규모가 커질수록 가장 효과적인 것은 화폐를 매개로 한 ‘시장 방식’입니다. ‘명령’에 의한 생산과 분배체계의 극단이 스탈린식의 공산주의입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놓으면 된다’라는 ‘시장 만능주의’가 다른 하나의 극단입니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현실의 인간과 인간의 행위를 지나치게 ‘이상화’시켰다는 점이고, 다른 공통점은 ‘망했다’는 것입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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