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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무엇인가 ㉓

기사승인 2021.05.07  16: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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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11)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역사 ⑤ : 경제학과 기본소득의 만남

○ 신용(信用, credit)과 신용의 타락, 그리고 은행

‘신용’이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기본의미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그러한 정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영어 credit의 번역어인 이 신용이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credit의 뜻이 ‘Daum사전’의 경우에도 명사로만 9가지가 나올 정도로 다양한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credit이 ‘신뢰’와 매우 밀접하다는 점입니다. credit의 라틴어 어원인 creditum이 ‘a loan(대출)’ 또는 ‘thing entrusted to another(다른 것을 위탁하는 것들)’이라는 뜻이고, creditum은 ‘to trust(신뢰하다)’와 ‘entrust(맡기다)’란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 credere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니까요.

어쨌든 신용이라고 할 때는 ‘신뢰’, ‘대출’, ‘믿고 맡기다’ 등과 연관되어 있고, 여기에다 ‘부채(負債, 빚, debt)’나 ‘채권(債券)’, ‘채무와 채권(債權)’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제의 역사에서 신용은 부채와 함께 소위 화폐라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등장하였고, 인류의 경제활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신용화폐(信用貨幣, credit money)라는 것은 부절(符節, 돌이나 대나무, 옥 따위로 만든 물건에 글자를 새겨 다른 사람과 나눠 가졌다가 나중에 다시 맞추어 증거로 삼는 물건)과 약속 어음 또는 작은 공동체인 경우 그냥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빚졌다는 식의 기록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무엇의 증명이나 증거가 될 만한 표식인 증표(證票)일 따름이었고, 그것이 부를 증식시키는 상품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신용의 기본의미처럼, ‘신용’이라는 것이 상호 부조의 연장, 인간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도덕 관념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경제적 의미에서의 신용이 ‘재화를 먼저 주고받은 다음에 그 대가나 대금을 뒷날 치를 수 있음을 보이는 거래 능력’으로 정의되더라도, 신용은 인간 사회의 상호 부조의 연장이라는 의미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합니다.

물론 공동체 밖에 존재했던 사람들, 흔히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러했는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십자군을 상대로 우려먹었던 것 같은 실화가 있으니 말입니다.

뒤이어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대목은 ‘중세시대 고리대금업을 했던 유대인들과 영주들의 공생관계가 영국의 영란은행(英蘭銀行, Bank of England)의 탄생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미국의 텍사스주가 20세기 초까지 은행업을 ‘부도덕한 비즈니스’로 간주하여 금지했던 사실도 새겨보면서 말이지요.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카톨릭)의 전통이 강해서 신용 대출에 이자를 붙이는 일, 특히 고리(高利)의 이자를 붙여 채무자를 착취하는 일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주들은 앞에서는 비난하면서 뒤에서는 고리대금업자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근대적 금융업의 모태이기도 하고, 스웨덴 국립은행(Sveriges riksbank)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국립은행이라 할 수 있는 영란은행은 1694년에 왕의 전쟁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런던과 에든버러 상인 40명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윌리엄 3세에게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자금 120만 파운드를 빌려주면서 시작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왕실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기도 했던 상인들은 국왕에게 전쟁 비용을 빌려주고 국왕으로부터 은행권 발행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 은행권이란 사실상 국왕이 상인들에게 갚아야 할 약속어음이었던 셈이었고, 영란은행은 소규모 은행들 사이의 부채를 정리하는 제3자(채권과 채무의 관계나 약속 이행 여부를 증명해주는)의 역할, 즉 청산소의 역할도 도맡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 은행권은 국정 지폐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근대 이후의 금융시스템이 정부의 차용증서, 즉 부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전쟁과 왕실의 사치로 인한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했고, 경제에 인간과 사회 그리고 도덕관념이 배제된 이자가 합법적으로 등장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돈에 이자를 붙이는 행위는 인류 역사에서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돈이 가치를 증식시키는 수단으로 상용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중세의 고리대금업자와 영주의 관계, 근대의 상인들과 국왕의 관계에 있어서의 공통점은 금권력과 정치권력의 야합이라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전자는 고리대금업이 생계 수단으로 강요(?)되었던 유대인들의 처지가 반영된 것이면서 비합법적이었던 데 반해, 후자의 경우는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계약’을 통해 합법성을 쟁취했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현대의 금융시스템 역시,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의 연장선 위에서 본질이 바뀌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습니다.

화폐의 본질과 시원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신용의 본래 의미가 너무나도 크게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가치중립적인 표현으로 보이는 ‘대항해시대’에, 아이작 뉴턴도 당했다는 남해 회사(The South Sea Company)로 대표되는 투기 열풍과 채무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채무자 감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나, 채무자 귀족은 감옥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수에게 주어진 특권은 거의 모든 차원에서 신용의 도덕적 왜곡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러면 영국 왕실은 120만 파운드라는 부채를 갚았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만일 영국 왕실이 그 부채를 청산했다면 영란은행은 존속하지 못했거나 민간은행 수준으로만 머물렀을 것입니다.

○ 제2의 물결 ③ : 클리포드 H. 더글러스(Clifford Hugh Douglas, 1879-1952)

‘기본소득은 무엇인가 ㉑’에서 소개한 밀너 부부의 기본소득 제안이 영국 노동당에서 거부당했던 그 시기 이후에도 기본소득 제안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엔지니어이자 제1차대전 참전 군인이었던 클리포드 H. 더글러스였습니다.

1879년에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더글러스는 조금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엔지니어로 생활하던 중 31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4학기 동안 수학했고, 졸업하지 않은 채 학업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1886년에 설립된 기업)의 직원으로 인도에서 근무한 것을 비롯해, 부에노스 아이레스 태평양 철도회사와 런던우체국 철도회사 등 기술자로서 대영제국의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시 영국공군(Royal Flying Corps)에 소령으로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우선 더글러스가 저서 『사회 신용(Social Credit)』의 1933년 개정판의 서문에 인용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의 연설문 중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브라이언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인데, 당시의 미국은 J.P.모건과 로스차일드 가문 등 금융업자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도금시대(Gilded Age)를 살았고, 여기에서 더글러스의 문제의식과의 공통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금권력은 평화로울 때는 국가를 먹잇감으로 삼고, 역경에 빠졌을 때는 국가에 대해 음모를 꾸밉니다. 그것은 왕정보다 훨씬 전제적이고, 귀족정치보다도 훨씬 무례하며, 관료정치보다 훨씬 이기적입니다. 금권력은 공공의 적으로서, 그것의 수단에 의심을 품고 그것의 죄상을 밝히려는 모든 이들을 탄핵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국민의 깨어 있는 양심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습니다.”

이에 앞서 더글러스는 제1차대전 중 왕립 항공기 시설의 작업을 재구성하는 동안 “한 주 동안의 총임금과 급여 및 배당금이 생산된 재화의 총가치 혹은 가격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그때까지 없었던, 기존의 경제학에서 다루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100개 이상의 영국 대기업에서 데이터를 수집하여 분석하였고, 파산한 기업을 제외한 모든 기업이 매주 생산되는 재화 및 서비스 비용보다 급여, 임금 및 배당금을 적게 지급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즉 생산비용은 늘 노동자에 대한 임금이나 급료를 훨씬 웃돌고, 한 나라의 상품의 총가격은 근로자의 총소득을 능가하기 때문에 근로자는 늘 소득(구매력) 부족에 시달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을 더글러스는 ‘A+B 정리(定理)’로 정식화했습니다. 그는 우선 기업의 생산비용을 A와 B로 나누었습니다. A는 노동자의 임금과 급여 등이고, B는 간접비, 지대, 이자, 장비와 재료비, 감가상각비 등을 말합니다. 그러면 ‘A+B’는 생산된 제품의 총가격이 되는데 사람들의 구매력은 A밖에 안 되기 때문에 생산된 전체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려면 B만큼의 추가 소득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를 근거로 그는 임금이나 급여 이외의 추가 소득이 주어져야 총생산과 총소득, 그리고 총소비가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관심사가 주로 온전한 경제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와 함께 온전한 경제시스템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자 하였던 것이지요.

그가 보기에 경제의 목적은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가 개인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어 사용가치를 실현하고 그에 따라 궁핍함 없이 여가와 자유를 누리며 좋은 삶을 영위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술적•물질적으로는 이미 그런 수준에 도달하였으나 독과점적 금융 체제가 경제적 권력을 유지하고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사회에 결핍을 부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다시 그가 파악한 딜레마를 보겠습니다. 은행의 융자로 기업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기업의 투자로 고용이 창출되며, 그 고용에 의해서만 소득이 생겨나고, 그 소득만으로 상품이 구매•소비되는 경로에서 ‘A+B 정리’가 적용됩니다. 즉 구매력은 A밖에 안 되는, 만성적인 구매력 부족의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지요.

이 딜레마에서 그가 발견한 금융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돈이 생산이나 소비의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은행의 금융적 이익만이 척도가 되어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 즉 영란은행의 영업 개시 이래 시작된 ‘이자가 붙는 부채의 논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자가 붙어 있는 부채’를 갚아야 하는 의무에 기초한 경제와 인연을 끊고 별도의 돈 흐름을 만들려는 그의 노력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이 금융체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자립적인 삶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 방법이 금융시스템의 사회화를 염두에 둔 ‘사회 신용(Social Credit)’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통화를 관리하는 부서인 ‘국가신용국(國家信用局, National Credit Office)’을 설치하여, 기존의 통화와는 달리 이자가 붙지 않는 ‘공공통화(公共通貨)’를 발행하고, 이것으로 일종의 기본소득인 ‘국민 배당(National Dividend)’을 지급하며 ‘과다이윤 환급’을 담당하게 하자는 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 신용과 국민 배당이라는 그의 제안은 새로운 금융시스템 도입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국민 배당과 사회 신용은 그가 목표로 했던 ‘완전균형’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 체제를 이루기 위한 개혁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제2의 물결 ④ : G. D. H. 콜(George Douglas Howard Cole, 1889-1959)

더글러스의 국민 배당과 사회 신용, 밀너 부부의 국가 보너스 개념을 ‘사회 배당’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의 지적 리더였던 콜입니다. 사회 배당은 그의 1935년 저서인 『경제 계획의 원칙(Principles of Economic Planning)』에서 처음 제시되었는데, 다음은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소득은 어떻게 ‧‧‧ 분배되어야 할까? 두 가지 가능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일한 것에 대한 대가 지불과 ‘수당’ 혹은 그것에 덜 모욕적인 표현을 부여한 ‘사회 배당’이다. 나는 분배 체계가 이 둘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믿는다. ‧‧‧ 전반적으로 소득의 두 가지 원천으로 일과 시민권이 남게 될 것이다. 일부 소득은 일에 대한 보상으로 분배되고, 일부는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사회 배당’으로서 직접 지급한다. 사회 배당은 시민 각각이 생산력의 공동 유산에 대해 소비자로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콜의 사회 배당이 용어 자체로는 새롭지 않으나, 여기에서 눈에 띄는 중요한 의미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본 생계 개념의 확장이고, 다른 하나는 토머스 페인과 토머스 스펜스의 ‘권리’로서의 기본소득 개념을 체계화시킨 점입니다.

기본 생계 개념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사회 배당이 개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즉 현금 소득의 필요성을 자유 개념과 연결시킨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는 ‘기본적 삶’ 또는 ‘최소 생계’의 경계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페인과 스펜스는 인류 공동의 유산인 토지에 대한 권리가 시민 모두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지대’를 모두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특히 페인의 경우에는 산업 생산의 결과물이나 개인 재산도 사회 속에서 가능하며 공동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지요.

콜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는 지적 전통을 바탕으로, 페인과 스펜스의 개념을 발전시켜 계획경제를 확립하고 사회 배당을 분배함으로써 모두가 기본적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사회 배당은 모든 시민들이 최소생계를 충당하는 데 충분할 정도가 되어야 하며, 임금 대비 비중이 점점 늘어나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국민소득의 2/3 수준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추산했습니다.

<덧붙임>

○ 제프리 잉햄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신용화폐는 중세와 초기 근대 유럽에서 화폐를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에 벌어진 두 가지 변화의 결과물입니다. 첫째는 상인 네트워크에서 구체적 채무 관계를 나타내던 증권들이 제3자에게 이전될 수 있게 됨에 따라, 상업 네트워크 안에서 사적 화폐로서 유통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둘째는 몇몇 국가들, 구체적으로는 왕실이 자국 내의 부유한 상인계급들로부터 자금을 차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란은행의 탄생은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인 결과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케인즈는 더글러스가 씨름했던 문제에 진지하게 몰두하였습니다. 그가 1936년에 출간한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주류 경제학 전체를 근본부터 다시 쓴 것이었고, 이 책의 말미에 더글러스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더글러스 소령이 비판한 정통파 가운데 일부와 달리 그 자신은 적어도 우리의 경제체제가 안고 있는 두드러진 문제점을 완전히 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자격이 있다.”

또 케인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문명의 미래는 더글러스냐 마르크스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르크스는 싫다.”

○ 더글러스의 주장 가운데 과잉 생산과 관련한 것 한 가지는, 당시 영국 국민 모두가 기본적인 의식주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생산은 “하루 7시간 일하는 가용 노동력의 25% 고용으로 달성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서술입니다. 이것은 “최소의 시간과 노동을 투입해서 최대의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여 분배하는 정부”를 제안했던 것과 연결됩니다.

○ 더글러스는 우리 산업의 생산을 결정하는 것이 소속된 공동체 사회의 문화적 유산이나 전통에서 비롯되며, 과거 세대가 축적해온 것을 우리가 공동으로 상속하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 모두는 그 상속인으로서 그에 대해 ‘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또 개인들의 노동의 성과와 대가보다는, 사람들이 결합해서 협력하는 것 자체로부터 생기는 새로운 ‘부’의 비중이 더 크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생산의 90%는 도구와 프로세스의 문제고, 실상 노동자의 능력은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훗날,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던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 1916-2001)이 ‘모든 소득의 90%는 이전 세대에 의해서 축적된 지식의 외부 효과(external effect)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을 선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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