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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무엇인가 ⑱

기사승인 2021.04.02  08: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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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3. 기본소득

7)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역사 ①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역사와 원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본소득이 담고 있는 철학적 바탕의 진화과정이 인간의 역사, 그리고 처했던 상황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기본소득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한다는 것은, 매우 방대한 자료를 살펴야 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저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요. 그렇지만 과거의 상황과 인식들이, 소위 원조격인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현재의 기본소득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기본소득에 이르기까지 거쳐 지나왔던 길은, 시대적 배경과 그로 인한 한계들이 함께 했던 역사의 문제인 까닭이고, 현재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의 배경과 견주어보며 반추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원조 ① :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원조로서 제1 후보는 에피알테스(Ephialtes, 기원전 ?-461)와 페리클레스(Pericles, 기원전 495-429)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아테네의 민주정은 노예제에 기반했고, 여성과 거류 외국인(시민권 없는 자유인) 그리고 노예는 참정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귀족과 평민의 긴장 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에피알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적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귀족회의의 정치권력을 빼앗는 조치를 취하고, 민회(Ecclesia)와 입법회의(Boule) 및 법정의 권한을 신장시키려 하였습니다.

에피알테스에 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생각이 깊고 매수가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고,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철저한 민주파였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61년에 에피알테스가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 뒤를 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귀족 출신이었으나 귀족파가 아니라 민주파(평민파)로서 에피알테스의 개혁을 완수하려 하였지요.

귀족이었던 그가 평민의 편에 섰던 이유는, 아버지 크산티포스가 ‘도편(陶片) 추방제(Ostrakismos, 도자기 파편에 참주가 될 사람의 이름을 적어내는 비밀 투표제)’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한 가족력 때문이었다는 설이 일반적이긴 합니다.

어쨌거나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이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에게 주목하는 지점은 민회와 법정에 참석하는 모든 시민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가난한 평민들도 생업에 대한 걱정 없이 적극적으로 공동체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전까지는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개혁으로 가난한 평민들이 민회에서의 ‘법 앞의 평등’과 ‘발언의 평등’을 얻긴 했어도 ‘권리의 평등’은 없었으며, 설령 권리의 평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권리를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은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도 빠듯한 민중들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취한 민주주의 개혁 조치는 노잡이(노를 젓는 사람)를 비롯한 모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공무(公務)에 참여하게 만들었으며, 대다수 민중에게 잠재돼 있던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바탕으로 아테네는 더욱 과감하게 바다로 나아갔으며,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폴리스들이 과두제(寡頭制, 소수의 우두머리가 국가의 최고 기관을 조직하여 행하는 독재적인 정치)를 유지하면서 내부의 잠재력을 훼손시켰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이끌어내었던 것입니다.

‘민회와 법정에 참석하는 모든 시민에게 수당을 지급했던 것’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게 만듭니다. 물론 이상적인 형태의 기본소득은 아니었으나, 스탠딩은 에피알테스를 "기본소득의 창시자 혹은 최소한 ‘시민소득 변종’의 창시자”라고 말합니다.

○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원조 ② : 삼림헌장

제2 후보는 1217년 영국에서 ‘대헌장(Magna Carta)’과 함께 발표된 ‘삼림헌장(Charter of the Forest)’입니다. 대헌장은 1215년 6월의 최초 ‘자유헌장’이 ‘마그나카르타’로 간주되긴 하나, 몇몇 부분이 ‘삼림헌장’으로 옮겨지고 다듬어진 이후, 1217년에야 비로소 ‘마그나카르타’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대헌장은 영국 귀족들이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세금을 올린 국왕 존(John)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왕에게 강요하여 받은 법률 문서이자 일종의 평화 협정 문서였습니다. 본질이 ‘왕과 귀족간의 갈등’이라는 점이라는 거지요.

그러함에도 1217년의 ‘대헌장’과 짝을 이루는 ‘삼림헌장’은 평민 남성(the common man)의 생존권, 그리고 에스토바르(estovar)라고 불리는 공유지 내의 생존 수단의 권리를 보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3세기에는 모든 교회가 한 해에 네 번 회중에게 ‘삼림헌장’을 낭독해주어야 했지요.

구체적으로는 들이나 숲 등의 공유지에서 소나 돼지를 방목하거나, 난방에 쓸 땔감을 수집하고, 건축 자재나 농기구 및 도구로 쓸 목재를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또 흉작시에는 도토리 등과 같은 야생식물을 채집하여 생계를 꾸리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다 모든 과부는 음식, 땔감, 주거 재료 등을 공유지에서 가져올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관습적인 공공소유권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을 뜻합니다.

‘삼림헌장’이 기본소득의 철학과 상통하는 부분이 바로 ‘공유자산에 대한 공평한 접근권’에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공유자산에 근거한 소득을 사회구성원들이 1/n로 나누자는 개념이고,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BIEN)’를 비롯한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과세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공유자산’들입니다.

따라서 ‘에스토바르(estovar)’라고 불렸던 공유재(공유자산)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 즉 최소소득을 보장받았다는 점, 그리고 모두가 공유자산을 자유롭게 이용할 권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보편성의 정신과 닮았다는 것이지요. (기본소득을 생각하다 ⑥, ⑬ 참고)

○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원조 ③ : 토마스 모어

제3 후보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입니다. 토마스 모어가 기본소득과 연관된 인물로 꼽히는 이유는 그의 저서 『유토피아(Utopia)』에 담긴 내용 때문입니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가상의 인물인 라파엘의 입을 빌려 “삶을 위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그 누구도 도둑질로 시작해서 목숨을 잃는 끔찍한 일까지 당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지만.”이라고 말합니다.

또 『유토피아』 제2권 「유토피아에 대한 강연」에서 라파엘이 묘사하는 ‘유토피아’는 초승달 모양의 섬입니다. 이곳에서는 2년간의 농촌 생활은 시민의 의무이며, 똑같은 모양으로 설계된 계획도시들로 이루어져 있고, 회의와 토론을 통해 결정되는 행정제도를 갖추고 있으며, 모두 함께 하루 6시간을 일하고,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생활합니다.

『4차 산업혁명과 기본소득의 미래』를 저술한 박형준은 토마스 모어가 “단지 도둑과 기근을 막는 방편으로서 기본 생계수단 제공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비극의 근원인 권력과 돈에 대한 탐욕을 없애기 위해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모두가 함께 일해 공동으로 사회적 필요를 해결하는 일종의 농업기반 공산주의 사회를 주장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유토피아』는 현대적 의미에서 ‘이상으로 그리는 가장 완벽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란 게 과연 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뒤섞이고, 현대적 관점에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가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게다가 유토피아(Utopia)가 어원상으로는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한다는 점을 근거로 하면, 오히려 유토피아는 서로 다른 종류의 ‘디스토피아(dystopia, 반이상향)’를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토마스 모어가 목도한 사회문제들의 악순환과 불안감, 즉 기본적인 생계수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21세기에 다시 마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느꼈던 공포감이 구체적으로 ‘인클로저(울타리 치기)’와 그로 인해 ‘버려지는 인간’이 무차별로 생겨난 것에 있다면, 우리가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과 근원이 아주 비슷하다고 보아야 타당합니다.

생계수단의 상실은 범죄와 폭력적 저항의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전반적으로 사회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불안정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원조 ④ : 후안 루이스 비베스

제4 후보는 후안 루이스 비베스(Juan Luis Vives, 1492-1540)입니다. 라틴어 이름은 요하네스 루도비쿠스 비베스(Johannes Ludovicus Vives)이지요.

기독교적 인문주의 관점을 지녔던 비베스는 한편에서는 구걸하여 연명하는 사람들로 도시의 거리가 넘쳐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부자들이 사치와 낭비로 방탕하게 살고 있는 현실은 자연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입니다.

“너의 재산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그것을 순전히 너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또 수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것을 혼자서 차지하고도 과연 정당하게 행동했다고 스스로 여길 수 있을 것인가?” - 『나봇 이야기(De Nabuthae Historia)』

BIEN(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은 기본소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최소소득보장(guaranteed minimum income) 개념’의 진정한 아버지로 간주되어야 할 사람은 비베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비베스는 부자들의 탐욕을 비판함과 동시에 일할 능력이 있는데 일하지 않고 빌어먹으면 안된다는 기독교적 윤리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BIEN의 기본소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일종의 ‘노동연계 복지제도(Workfare)’를 주장했던 것이니까요.

그의 「빈민 구호론(De Subventione Pauperum)」은 공공부조 제도를 논리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저작이며, 이것이 1601년 엘리자베스 빈민법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지방정부를 구빈의 주체로 내세웠다는 점, 자선이나 교구 단위의 구빈 활동으로는 문제 해결이 힘들다고 판단했다는 점, 고아들의 경우 따로 고아원을 만들어 보호하면서 학교 교육과 직업 교육을 시켜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양성해야 한다고 제안한 점, 국가가 이들에게 각종 상공업 분야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숙련되면 독립해 사업을 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제안들은 공공부조의 대가로 노동을 시키는 것에 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람들이 게으런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을 부과한 것은 옳았다.”는 판단 아래에 있습니다.

만일 비베스의 제안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기본소득제가 아니라 ‘완전고용을 전제한 복지국가 모델’에 가까워 보입니다. 비베스는 「빈민 구호론」에 이렇게 서술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강제하신 법률을 인정해야만 한다. 즉, 모든 개인은 각자의 노동을 통해 빵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 가난한 이들은 누구나 연령과 건강 상태를 살펴서 일할 수 있다면 모두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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